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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느니 쓰지 Oct 31. 2018

누가 눈물의 목적을 정했나 만들었든 참았든

No.21 <만든 눈물 참은 눈물>_이승우

소설가 이승우의 스물 일곱편의 짧은 소설들.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 소설집을 "언제 발아할지, 어떤 나무가 될지 모른 채 씨앗의 형식으로 기다리고 있는 메모장 안의 모티프들" 이라고 말했다. 짧은 소설들은 늘 짧아서 싫고 또 짧아서 좋다. 스물일곱개의 글 중 괜찮았던 몇 개의 글을 축약하고(몇 편은 본문 그대로 실고) 나도 단상을 남긴다.



<만든 눈물 참은 눈물>

케이는우연히 TV를 보다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대국민 사과를 하는 유명배우의 기자회견을 보게 되었다. 그는 고개를 약간 떨군 채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카메라를 힘없이 응시하며 죽을 죄를 지은 자신을 용서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약간 눈물이 맺혀 있었는데 그것은 맺혀있을 뿐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장면을 보며 케이는 '눈물을 만드는 것'과 '그 만든 눈물을 참는 것' 사이의 의미와 효과를 생각해 보았다.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는 편이 훨씬 호소력 있다는걸 배우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케이는 그렇게 '만든 눈물과 참은 눈물 사이의 역학관계'를 생각하다가 자신이 얼마 전에 사귀다가 헤어진 여자와의 마지막 이별 장면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것이 만든 것이든 참은 것이든 '과연 동정표를 얻기 위한 눈물이 나쁜것인가?' 생각해본다. 대체 눈물의 목적은 누가 정했나. 목적이 동정이라면 목적달성을 위한 스킬로서 참은 눈물은 의미가 있다. 유명배우는 자신의 장기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고 있고 우연히 예민한 시청자에게 들켰지만 그는 공범이었다. 공범이라고 하니 둘이 뭐 대단한 잘못 한 것 같이 보이지만 연기자가 연기로 위기를 돌파한 것이 비난받을 일인가? 헤어지는 연인에게 나오는 눈물을 참음으로 배려하는 것이 범죄인가? 생각해보면 원래 연기도 구라고 사랑도 거짓을 용인한다. 거짓된 판에서 속이는 행위를 그럴듯하게 한 자들을 비난할 근거는 무엇일까? 그런데 과연 속는 자는 누구였을까?


<말하려 한 것과 말해진 것 사이의 거리>

바꿔 말하면 주체는 어떤 말을 하려고 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말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중 감정 상태에서 혼란을 겪는다는 식이었다. 혹은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려고 한다고 할까.(p.51)


왜 말하려 한 것과 말해진 것 사이의 간극이 발생하는걸까? 아마도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의 권력관계 때문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워 보았다. 실망을 하든 감동을 받든 평가받는 나의 말은 늘 감정을 약탈당한다. 그렇다면 그 말은 오롯이 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권력관계를 염두해두고 발화된 내 말의 이중감정은 말에 대한 소유권 포기와도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말에는 소유권이란게 없다. 그것은 화자와 청자의 공유자산이다. 의도치 않은 말을 한 것도, 불쾌한 말을 들은 것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말에는 주인이 없으므로.


여기까지 내 말에 대한 책임회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왜 말하려고 하는 것 그대로 말해지지 않는 것일까?



<합리화 혹은 속임수>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합리화 혹은 속임수' 이다. 우리는 합리화를 위해 속임수를 쓰기도 하고, 속임수를 쓰기 위해 합리화를 요청하기도 한다. 가령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하고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행위나, 몇 년간 꽤 진지하게 사귀었던 남자와 헤어지고 난 후 던지는 '지우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워지고 싶을 뿐이다' 같은 말들.

헤어지고 나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는 했었지만 아마 그건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었을 거야' 하고 스스로를 속이거나 '지우기 보다 지워지고 싶다'는 말로 본인을 피해자로 만들어 합리화 한다. 속임수와 합리화가 자기 방어처럼 느껴지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심리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일이므로.


지나간 모든 연인들은 다 개새끼고 나쁜년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게 아니라 누군가의 개새끼였거나 나쁜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우리 정신건강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그 때 그 년이 계속해서 나쁜년이거나 그 새끼는 영원토록 죽일새끼인게 우리 정신 건강에 좋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개새끼와 나쁜년들이 새로운 개새끼와 나쁜년을 만나 물고 빨면 희박한 확률로 개새끼 곱하기 개새끼를 해서 '안 개새끼'가 될 수도 있다. 확률은 그리 높지 않지만. 이것이 사랑의 본령이다.



<그럼 벗고 다녀요?>
어떤 고위층 사모님이 주변 사람들하고 봉사모임을 하는데 그 모임에 '실크로 만든 몸빼'를 입고 봉사를 하다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았나보다. 소설은 한 사모님의 열변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자신의 옷이 이슈화된 것에 대하여 '기가 차서' 쉬지 않고 내뱉는 일종의 기자회견문이다. 그런데 읽어보면 사실 약간 랩 같다. 그녀는 옷을 매개로 '표현의 자유'와 '가격의 상대성'과 '취향의 존중' 문제를 코믹한 문체로 9페이지에 걸쳐 일장 연설 한다.

톰 브라운은 또 무슨 브랜드냐. 세상은 넓고 브랜드는 많다. 한국유치원총연합회 대표가 톰 브라운을 입었는지 말았는지 보다 이쯤되면 '내가 몰라야 비싼 브랜드구나' 라는 생각에 자괴감을 느낀다. 또 검색해보니 그녀가 입은게 4만원짜리 톰 브라운 짝퉁이란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지 "티셔츠에 4만원이나 쓰다니 미쳤군 미쳤어. 애기들 지원비 쏙쏙 다 빼먹고"


전체적으로 이 소설집이 대부분 사랑이나 말에 대한 진지한 담론들로 채워져 있는데 <그럼 벗고 다녀요?>는 상당히 위트있는 구성과 문체의 글이다. 작가는 대놓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고위층들에게 말할 기회를 제공한다. 기자 눈치 보지 않고, 네티즌 악플 신경끄고 한 번 속 시원히 말해보라고. 그녀의 말이 나름 설득력이 있어 재미있다. 작가는 묻는다. '고위층의 과소비로 서민들의 사회적박탈감이 만연한 사회'와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마녀사냥이 팽배한 사회' 중에서 어디가 최악이냐고. 그러나 물어볼 것도 없이 답은 간단하다. 최악은 '둘 다 여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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