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2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_백소영
(p20) 페미니즘이란, 현 체제 밖의 시선이고, 사유이고, 언어이다. 5천년 가부장 역사 가운데 가장 대규모로, 가장 지속적으로 시스템 안에 있었으나 현재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참여한 바 없고, 이 시스템 안에서 자기 위치 역시 스스로 결정한 바 없었던 여성들이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주의'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시스템을 옹호하며 '명예 남성'의 삶을 선택한 생물학적 여성들의 의미추구는 '체제 안'의 사유와 행동이기에 페미니즘이 아니다. 또한 생물학적 남성 (그리고 그 어떤 자기정체성을 가지든)이라 해도 주체로서의 자기주장이 현재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반영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그 역시 은유로서는 '여성'이기에 그의 해석은 페미니스트적 성찰에 포함되어야 한다.
'백소영의 페미니즘'의 시작은 배제와 소외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되고 소외된 모두는 광의의 범위에서 페미니즘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시스템 안에 대규모로 속해 있기는 했으나 시스템을 만드는데 기여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 모두 '은유로서의 여성' 이다. 이 부분이 성경적으로도 연결이 된다. 그녀는 예수를 역사상 가장 페미니스트적인 '남성' 이라고 말한다. 세리와 죄인 특히 창녀들의 친구였던 예수는 시스템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아우르고 위로하는 삶을 살았다. 그녀가 말하는 성경적인 페미니즘이란 가부장적 유대교-기독교 체제의 전통 안에서 배제되었던 여자들의 주체적 경험과 의미를 자꾸 불러오는,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오는'(p28) 것이다.
지난 5천년의 남성중심적인 역사를 그녀는 '남근로고스중심주의' 라고 표현한다. 남자들이 시스템을 만들고, 지배하고, 운영하면서 남성 특유의 속성들이 시스템에 고착되어 '자연스러워' 졌다는 설명이다. 질서라는 이름으로 종속관계를 합리화하거나, 남녀의 구분된 역할을 다음세대에 교육해 왔다. 이러한 남근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 페미니즘의 원형이었고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페미니즘은 발현됐다.
예컨데 미국 사회에서 백인 중산층 부녀자들의 페미니즘과 노예 출신의 흑인 여성의 페미니즘을 같은 기준에서 취급할 수 없다. 언어가 다르고, 대응방식이 다르고, 이상향이 다르다. 백소영은 이러한 페미니즘의 역사와 다양성을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왜 우리는 페미니즘의 역사와 다양성을 이해해야 할까? 나는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계속해서 부딛히는 성대결의 주요 이슈'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의 성갈등의 주요 의제 중 하나가 '미러링'이다(상대방의 잘못, 특히 여성혐오 적인 말이나 글, 사상·행태·행동을 등장인물이나 화자의 성별만 바꾸어 반대로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사회의 골조를 이룬 여성혐오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논증 및 설득 전략_출처 : 페미위키). 미러링에 대한 백소영의 입장은 '제한적 수용' 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이상적인 세계는 '모든 종속적인 관계를 거절하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각'이 없는 세계다. 특히 일부 페미니즘 진영에서 '남성 위에 여성'을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남근적 피라미드 조직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미러링은 지난 5천년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여성들이 시스템에서 소외되었고, 강압적인 처우를 받았는지에 대해 남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미러링을 통해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희롱하고, 비꼬는 것이 기분 나쁜가? 그것이 지난 5천년의 세월 동안 여성들이 겪어왔던 수모고 위협이었음을 남성들이 깨닫길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남성 입장에서 미러링의 과격함을 쉽게 수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역사를 이해하면 이런 식의 폭력적 양상이 하나의 과정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 페미니즘은 남성중심적 사회의 '굴종의 여성상'에서 '전투적 여성상'을 거쳐 '화합의 여성상'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이미 미국과 유럽 페미니즘이 겪었던 단계를 한국에서도 밟아가는 것이고 진통은 있겠지만 결국 이상적인 페미니즘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축인 기독교에 대해서도 책은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준다. '하와를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부터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가르침까지. 성경과 기독교 곳곳에 성차별적인 텍스트가 넘쳐난다. 성경이 아니더라도 한국 기독교 특유의 가부장적 태도는 어떠한가? 특정 교단에서 여성에게 목사안수 주는 것을 금지한다든지, '권사는 식당-장로는 주차 봉사'로 확실하게 구분된 교회 내의 성역할. 그리고 계속해서 드러나는 목회자들의 성범죄들은 언급하기에도 부끄럽다. 교리적으로나 현상적으로나 기독교는 페미니즘 진영 안에서도 배척될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 안에 기독교적 맥락들을 소개하려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일단 서문에서 말한 '예수님의 페미니즘적 삶'이 가장 핵심적인 기독교 안의 페미니즘에 관한 설명이다. 5강 <페미니즘으로 성경 읽기>에서는 주목되지 못했던 성경 안의 다양한 '여성 리더십'을 조명하였으며 또한 성차별적인 성경 텍스트들을 읽는 방법론을 설명함으로써 기독교 윤리학 전공자로서의 저자의 역할을 다했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스트로서 21세기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페미 언니'들을 소개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머무는 페미니즘이 아닌 더 넓게 확장될 페미니즘을 기대한다.
교회 오빠로서 살아가는 나는 페미니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누가 나한테 '그럼 너 페미니스트야?' 라고 물으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 라고 대답한다. 하기 싫어서 아니라고 답하는 것이기 보다 그 단어의 무게를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지난 5천년이 남성중심적 사회였음을 인정하고 여성들의 배제와 소외에 일정부분 책임을 느낀다(나도 34년을 살았으니). 미러링에 대해서도 전부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에도 선뜻 '나는 페미니스트야!' 혹은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 라는 말을 하기에 주저하게 된다. 백소영은 그러한 남성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들어주는 일' 이라고 한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남자들의 습성도 '남근로고스중심주의'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설명하려 들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 가만히 들어주는 것이 지금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여자들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페미니즘을 응원하는 남성이라면 어디가서 '나도 페미니스트야!' 라고 떠들기 보다는 그냥 들어주어라. 듣는 사람은 가끔 울컥하고 억울하다. 분연히 일어나서 한 마디를 거들고 싶을텐데 그 때마다 '말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던' 지난 날의 여성들(은유로서의 여성들을 포함하여)을 생각하며 꾸욱 참고 들어보자. 그럼 반은 먹고 들어간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교회의 남자들은 닥치고 들어주라.
너희가 닥치고 들어주면 이로써 너희가 덜 빻았음을 여자들이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