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중년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룩쥔장 Apr 03. 2023

내 젊은 날에도 오픈런은 있었다.

중년단상

몇몇 인기 상품에 국한됐던 오픈런 현상이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를 중심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MZ세대가 주로 이용하는 인스타그램에는 ‘오픈런’이란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8만 건 넘게 올라와 있다. 명품뿐만 아니라 인기 캐릭터 스티커가 들어 있는 빵, 유명 연예인이 출시한 소주, 금리가 높은 예·적금 등 다양한 상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오픈런, 오픈런, 오픈런을 하고 있다.

                                                   "MZ가는 곳엔 오픈런이 있다"_조선일보 2023년 4월 2일자 기사중


요즘 '오픈런'이란 단어가 참 많이도 들려온다. 한정수량만을 판매하는 명품이나 신규출시되는 IT 기기뿐만이 아니다. 유명 맛집, 희귀 스티커가 종류별로 들어가 있는 편의점 빵까지.

'뭐 이런 것까지 줄서서 사야하나?' 싶을 정도의 소소한 것들까지 오픈런이 대세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성취감과 특별한 경험을 중시한다는 MZ세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오픈런'이란 묘한 단어의 조합이 주는 느낌이 낯설뿐, 원하는 것을 사기 위한 줄서기는 낯선 문화가 아니다. 유명한 맛집, 연예인의 등장이 예견되어 있는 매장, 신규오픈 기념 사은품이 지급되는 곳, 시즌에만 오픈하는 시설등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곳에선 언제나 줄서는 광경이 펼쳐졌었다. 최근 유명 베이글집, 명품샵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길게 늘어선 줄을 뉴스로 보며 이 갱년기 아짐은 불현듯 25년 전 내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대학 졸업한 해, 큰 아이 임신과 함께 결혼했던 난 아직은 젊은 이십대 중반의 새댁이었다. 

1년이 채 안 되는 직장생활 후에 갑작스럽게 한 결혼이었기에 남편과 난 당연히 가난한 신혼이었다. 부모님이 얻어주신 재개발을 앞둔 낡은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출산을 앞둔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왔다. 아직은 신입사원이었던 남편의 월급은 적었고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오백원 단위까지도 꼼꼼하게 가계부에 기록하던 난 어린 주부였다. 다른 신혼부부들이 응당 하는 집 꾸미기도 들어가는 돈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는 포기했다. 대신 동네 책방에서 주부잡지를 잔뜩 빌려와 책자 속의 인테리어를 몇번이나 들춰보며 상상만으로 만족해야했다. 


한겨울이 지나고 향긋한 봄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도 흐드러진 벚꽃과 함께 찾아왔다. 칙칙한 집안에 화사한 화분이 간절했다. 구독하고 있던 신문 사이로 새로 오픈하는 마트의 전단지가 끼어왔다. 정가보다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빼곡한 품목별 사진 사이로 오픈 기념 꽃화분을 선착순 20명에게 증정한다는 문구가 내 눈에 들어와 박혔다. 

시장에 갈때마다 꽃집에 내놓은 꽃화분들에 눈길을 빼앗겨 몇번이나 서성이다 돌아서던 때였다. 그땐 화분 하나 사는 것도 큰 사치처럼 느껴졌었기에 입맛만 다시며 아파트 화단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랬던 내게 그 전단지는 소중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해당 전단지를 소중히 떼어내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여놓고 사은품이 증정된다는 오픈일을 몇번이나 확인했다. 


오픈 당일, 처음 가보는 낯선 동네에 버스를 두번이나 갈아타고 찾아갔다. 하늘하늘한 입부복을 입고 전단지를 손에 꼭 쥔채 전단지에 나온 약도를 짚어가며 마트가 들어선 골목안으로 접어들었을땐 이미 줄이 늘어서 있었다. 가까이 사는 동네 아줌마들이 이미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일찌감치 줄을 서고 있었다. 나처럼 먼 동네에서 혼자 온 사람은 별로 없어 보였다. 선착순제라 20명안에 들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에 우선 늘어선 줄에 합류했다. 맨앞에 선 사람부터 순번을 세어보며 간당간당한 숫자에 마음을 졸였다. 


오픈 시간이 되어 마트문이 열리고 매니저인 듯한 남자가 나타나 줄을 다시 정비하기 시작했다. 줄섰던 사람들의 기대 섞인 웅성임이 들리고 이내 줄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화분 하나씩을 받아들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번 안에 들지 못해 저 화분을 받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조바심에 가슴이 떨려왔다. 남편 출근시키기 무섭게 아침부터 버스를 골라타고 온 성의가 무참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뱃속의 아이까지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마지막 스무번째였다. 직원이 건네준 화분을 받고 돌아서는 내 모습뒤로 아쉬워하며 빈손으로 돌아서는 뒷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고 나는 밀려드는 안도감으로 어깨를 한껏 펴며 당당하게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사은품으로 받은 화분은 생각보다 작았다. 분명 전단지의 사진으론 큰 화분이었는데 내 손에 들려있는 건 사진의 반밖에 안될것 같은 크기였다. 꽃나무라 했지만 꽃도 피지 않았고 가지도 빈약하기 이를데 없었다. 냉정하게 보면 이걸 받겠다고 온 차비와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공짜로 화분을 얻었다는 것에 난 신이 났다. 무슨 대단한 전리품이라도 얻은양 소중하게 화분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당시 신혼집과 오분거리에 살아 우리집에 자주 들리시던 친정엄마는 낯선 화분과 그걸 얻기까지의 내 얘기를 들으시더니 애잔하게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요만한 화분 하나 받겠다고 거기까지 간거야?  세상에 공짜가 없지? 화분이 그렇게 갖고 싶었으면 엄마네서 가져가지."

"아니야. 뭐 놓을 데도 없는데. 난 하나만 있으면 돼. 그래도 공짜였다니깐."


생각해보니 내 젊은 날에도 오픈런은 있었고, 한푼이라도 아껴보려던 아줌마들은 그곳에서도 부지런히 줄을 섰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와 화해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