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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나라의 어른이 Mar 23. 2022

라이벌, 지속가능성이 전제된.

진정한 라이벌의 역할과 책임에 대하여

 요즘 TV를 켤 때마다 방송인 유재석과 강호동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지상파, 공중파를 가리지 않고 이 두 사람, 특히 유재석 씨는 너무도 잦은 출연에 식상할 만큼 대중적인 인기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재석 씨는 개그맨으로 출발하여 지금은 최고의 MC로 자리 잡고 있고, 강호동 씨도 국가대표급 씨름선수로 출발하여 지금은 유재석 씨에 필적할 MC로 경쟁하고 있다.  전혀 다른 외모와 경력만큼이나 진행방식도 차별적인 이들은 이른바 방송 MC 분야에서 최고의 라이벌로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각자가 처음 시작한 분야인 개그개나 씨름판에서는 전혀 라이벌 관계가 될 수 없었지만, 현재 활동하는 분야로 한정 지을 때 경쟁자로 인식하는데 가끔 엉뚱한 웃음을 주기 위한 어설픈 씨름 경기 장면을 볼 때는 전혀 긴장감을 느낄 수 없다. 


 라이벌(Rival)의 정의는 사전적으로 “서로 대립하거나 경쟁(선의의 경쟁 포함)하는 관계를 일컫는 말”로서 직역하면 '경쟁자'이다.  어원은 stream, 즉 작은 시내, 개천이고, 그런 의미의 프랑스어 rivus의 파생어인 rivalis까지 거슬러 간다.  좁은 강물 자원과 통행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 관계에서 형성된 단어로 추정된다.  그러기에  라이벌은 경쟁을 통해서 서로를 인정하고 발전하는 형태로 인식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상대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선의(善意)보다는 적의(敵意)를 가진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생명의 젖줄인 강물을 사이에 놓고 경쟁하고 있기에 우선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이 경쟁하는 둘 사이의 관계를 바라볼 때 표현하는 용어로써의 라이벌이 정작 자신들에게는 ‘숙적이나 앙숙’ 관계로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상대를 용납하기 어렵고 양쪽 모두 자기가 정의로운 존재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우리 사회 여러 영역에서 서로가 빼앗기고 싶지 않은 ‘생명의 근간인 강(river)'과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경쟁자(competitor)를  중심으로 라이벌 관계라고 지칭하고 있다.  대부분 스포츠 분야에서 수위를 다투는 선수들을 관심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평가할 때나, 산업별 치열한 경쟁이 발생하는 곳에서 활동하는 유력한 기업들 간의 힘겨루기를 다룰 때 흔히 사용한다.  언급한 바와 같이 반드시 ‘같은 강물’을 공유하고 있기에 한쪽이 승기를 잡으면 다은 쪽은 가져야 할 몫이 그만큼 작아지기 마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축구선수인 경우에도 국가대표급 남자 선수, 여자선수, 유소년 선수급들로 세밀하게 나누어서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동등한 조건에서의 상호 우위를 판단하는 것이니 만큼 과도하게 넓혀진 범주로 확장하면 의미가 퇴색하기 때문이다. 비록 세계적 수준의 역량을 가진 기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삼성전자와 포스코를 라이벌 관계로 설정하면 일반이 모르는 새로운 사업 진출 계획을 감추고 있는지? 와 같은 엉뚱한 의심만 초래하기 때문이다.   


 최근 대통령 선거를 위한 경쟁구도에 대한 논의가 무성했다.  유력한 후보를 가진 진영 사이의 과열된 경쟁은 피차 라이벌 의식을 갖는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군소 정당 후보로 출마한 정치인들의 갈망은 경쟁구도 속에 자신들도 라이벌로 인정받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목표였.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라이벌 관계의 성과물에 관해서는 제로섬 관계이기에 한쪽이 흥하면 다른 쪽은 약화되어 하므로 인지도가 낮은 후보와의 대립은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므로 라이벌 관계로 발전될 수 없다.    


그런데 진정 라이벌이라면 그 생명줄과 같은 강물의 훼손이나 고갈 등의 재난에 대처하는 행동 조건이 필요하다.  강물은 자신과 상대 모두가 존재에 필수적인 자원이기에 그토록 경쟁관계로 다투고 있지만, 그 강물이 사라지는 상황에 처하거나 제3의 존재로 인해 그 강물의 훼손이 위협받는 때에는 태도를 바꾸어 보존을 위한 적극적인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강을 지켜내야 하는 일이 경쟁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대부분 경쟁으로 인한 갈등이 깊어질 때 흔히 ‘강을 훼손’하는 위협까지도 불사? 하는 결의를 다지는 사례를 경험하기도 한다.  도무지 라이벌이라는 용어에 걸맞지 않다.


 라이벌은 대상 자신이 스스로 정의하는 경우보다는 관계를 바라보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둘 사이의 긴장관계를 라이벌로 보는 경우, 진정한 모습은 그들이 속한 생태계를 훼손하려는 시도를 하거나, 자신들의 고유영역을 침범하는 제3의 간섭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면모를 동시에 관찰해야 한다.    끊임없는 경쟁을 통해 더 나은 존재로의 발전을 통해 공유된 강물의 활용도를 높이고 지속 가능한 공유재로 보전해야 할 의무까지 요구되어야 한다.  타인의 시각으로 라이벌이라고 선정되었다는 것은 그 분야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서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에 수위자로서의 영애와 누리는 이면에 따르는 책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이해, 회사 내에서의 경쟁이나 혹은 자신이 속한 여러 형태의 공동체에서 라이벌 의식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철강산업분야에서의 라이벌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근대 철강업의 발달과정을 다 설명할 순 없지만 치열한 경쟁이 지역 내부로부터 시작하여 국가 간, 그리고 대륙간으로 확대되었다.  일본 철강업을 포함한 과거 우리나라가 추격하던 선진기술들을 따라잡았을 때 추격자의 입장에서는 비로소 그들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나, 그들은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처지에 놓인 것에 대한 분함과 황망함으로 라이벌 의식보다는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다는 절박감과 원망으로 대처하려 한다.  그래서 불현듯 철강업에 닥친 탄소중립 구현과 같은 절박한 여건 변화에 대응한 국가 간 연대와 협력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한두 지역이나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에너지 전환에 우물쭈물하다가는 산업이 오랫동안 지속시켜야만 할 생태계를 지켜 낼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여러 분야에서 추격자에서 추격당하는 입장으로 변하는 영역이 늘어나고 있기에 경쟁심만을 생각하는 근시안적 사고 경계하여 상대를 인정하고 공유한 생태계의 건전한 확장을 고려해야만 다시 풍족한 강물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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