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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는김작가 Nov 27. 2016

「행복해도 괜찮아」

#52.알프레드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로 행복을 장전할 시간.


나는 행복한가?

이 물음에 바로 'yes'를 외칠 수 있다면, 이 책은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


'나는 행복한가?'


다시 이 물음에 접근했을 때 조금이라도 대답이 망설여진다면, 이 책은 늘 머리맡에 두어야 한다.

혹여 조금이라도 그 누군가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아 우울하다면, 혹여 용기가 나지 않아 앞에 놓인 과제에 머뭇 망설이고만 있다면, 지금 바로, 이 책의 책장을 넘겨야 한다.


'행복해질 용기'의 시작이다.




누구나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아들러는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고.

19세기 유명한 시인 아르튀르 랭보도 '모든 존재는 행복의 필연적인 운명을 갖고 있다'고 언급한 것을 생각하면, 인생에서 '행복'은 참 유의미한 화두이리라.

그렇다면 도대체 그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

개개인에 따라 수천 수만가지의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아들러는 자신있게 외친다. '미움받을 용기'를 지니라고. 그리하면 그 용기에 대한 포상으로 '행복' 이 자신의 내면에 충만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심리학 3대 거장 중 한 명인 <알프레드 아들>. 

남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중심 과제로 삼았다고 한다.

아들러는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만든다'는 프로이트의 <원인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인간은 과거가 불행해서 현재도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그 불행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독특한 이론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사람은 누구나 현재의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일명 <목적론>을 펼친다.  


아들러의 <목적론>에 의하면, 자신과 타인의 말이나 행동을 판단할 때에는 거기에 숨어있는 목적을 꼭 생각해봐야 한단다. 아울러, 인간은 과거의 사건에 의미 부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행동을 달리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자신의 목적에 따라 얼마든지 '변신'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과거에 얽매이지말고 '현재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과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지언정 개의치 말고 인생의 여러 문제를 직시할 <용기>를 내서 행복을 위해 과감히 도전하는 것' 뿐이라 한다.


'우리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둘릴 정도로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미움받을 용기>속의 아들러는 이렇게 끊임없이 외친다. 자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강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과거가 '지금'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금'이 과거를 정하고 있다.



 어떤 인간도 순풍에 돛 단 듯이 순탄한 인생을 살지 않는다.
 누구나 슬픈 일을 겪고, 좌절하고, 이가 갈릴 정도로 분통 터지는 일을 당하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과거에 겪은 비극을 '교훈이나 기억'으로 말하는 사람이 되고, 어떤 이는 그 일을 털어내지 못해 어쩔 수 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극이라는 안주에 취해서 불행한 '지금'의 괴로움을 잊으려고 한다.



'과거'라는 개념에 대해 새로이 생각해보게 하는 이론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당신은 큰 좌절 없이, 거대한 부조리를 겪어보지 않은 채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그런 소리 하지 말.'고 할 것이란다. 이에 대해 아들러는 '자신은 오직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과거를 필요에 의해 끌어다 자신의 현재 좋지 않은 상황을 설명하는 데 급급하다며, 어서 그 오류에서 벗어나길 권한다.


우리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네. 열 명이 있으면 그 열 명 각기 다른 '지금'에 의해 채색된 각각의 해석이 있을 뿐이지.
과거란,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네…….
인간은 누구나 '나'라는 이야기의 편찬자이고, 그 과거는 '지금의 나'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다시 쓸 수 있네.  
인간은 과거에 일어난 방대한 사건 중에서 지금의 '목적'에 합치되는 사건만을 골라서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으로 삼는다는 거지. 거꾸로 말하면, 지금의 '목적'에 반하는 사건은 지워버리는 거지.


그러니  '지금의 목적'에 의해 조작되었을지 모를 과거 따위에 연연하지 말고, 오직 눈앞에 있는 '현재의 나'를 바로 알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에만 집중하라거듭 당부한다.




우리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가 시련이고, '지금, 여기'라는 일상에 큰 결단이 필요하다네.


인간에게 시련이나 결단의 순간은 입시나 취직, 결혼 같은 상징적인 이벤트가 있을 때만 찾아 오는 게 아니야.
우리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가 시련이고, '지금, 여기'라는 일상에 큰 결단이 필요하다네. 그 시련을 피해 가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어.


이른 아침 눈 뜨자마자부터 다시 잠들 때까지, 정말 대부분 특별할 것 없는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이래 저래 쌓이는 상처들로 감정선은 항상 오르락내리락 이다. 아닌게 아니라,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가 시련이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금 여기'에 집중해서 진정한 행복을 얻어야 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나는 행복한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스스로 행복을 실감하지 못한다면, 인생에서 꼭 해야할 과제들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들러는 답한다. 그는 <인생의 제>들을 회피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미움받을지언정 <용기>를 내서 그 과제들을 직시하고 정면돌파해 '지금 여'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길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아들러가 제시하는 여러 인생 과제 중 정말 피해서는 안 될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 사랑의 과제> 란 무엇일까?

 



첫째. 일 자체가 아닌 '일과 관련된 인간관계'에 보다 집중하는 <일의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인간은 도덕적인 선악을 따지기 이전에 어쩔 수 없이 일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더구나 혼자서는 살 수 없니, 일을 할 때 필수적으로 분업을 해야 한다. 그 분업의 과정은 일의 좋고 싫음을 떠나 타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하므로 타인을 신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일을 할 때 의심스러운 사람과는 결코 서로 협력할 수 없다. 그래서 타인을 믿는 '진정한 신뢰'가 매우 중요한데, '진정한 신뢰'란 뭔가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을 그 자체로 믿는 능동적인 작용을 의미한다. 다음 <교통법규의 예>를 보면, 타인을 믿지 않고선 한시도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점은 나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명백한 사실'이라 새삼 고개가 끄덕여졌다.


 '모든 사람은 교통법규를 지켜야 한다'라는 <신용>을 바탕으로, 파란불이 켜지면 횡단보도를 건넌다. 이때 우리는 (운전을 하는) 낯선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좌우를 확인하고 건너게 된다. 이것 역시 '낯선 타인을 일정 부분 신용한다'는 뜻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원활한 교통'이라는 공통의 이해에 부합하는 <일의 과제>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순간에도 타인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즉, 타인을 믿는다는 전제하에 여러 일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진정한 신뢰를 바탕으로 타인을 믿고 협력해 <일의 과제>를 완수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에 대한 보람과 나아가 개인의 성장을 이루게 한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와 '공동체에서 할당된 분업의 역할을 어떻게 완수하느냐'에 달려있다.


교육에 있어서도 가르치는 일 자체 보다 '교우 관계를 맺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사는 아이들과 단순히 가르치는 '일'의 관계보다는 진정한 '교우 관계'를 맺어야 한단다. 그리고 교육을 할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의존적인 아이가 아닌, 진정한 자립을 할 수 있는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사가 해야할 <일의 과제>다.

이것은 교육자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부모나 교육자는 아이 앞에서 수직적 권위가 무너질까 봐 두려워할 게 아니라, 매일의 행동을 전부 아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교사나 부모는 그 결정에 필요한 자료(예를 들면, 지식과 경험)를 제공해주는 정도의 역할만 하라고 강조한다.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이것만큼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요즘처럼 어수선한 시국을 보면 더 더욱 그 의미가 깊게 다가오는 문장이다.





둘째. 타인을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교우 관계를 맺는 <교우 과제>를 통해 '진정한 소속감'을 얻어야 한다.


인간은 나약함 때문에 집단을 형성하고 사회를 구축했다. 우리의 힘과 문명은 나약함의 산물이며, 인간에게 고립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고립된 인간은 몸의 안전뿐 아니라 마음의 안전까지도 위협을 받는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는 타인과 강고한 '유대'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이 유대를 <교우 관계>라 말할 수 있다. …… 이 교우 관계는 더 나아가 <공동체 감각>을 지닐 수 있게 한다.  


아들러는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교우 관계>를 맺은 후, 더 나아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없어서 안 될 <공동체 감각>을 기르길 권장한다. 그리고,

교우관계를 맺을 때에는  '타인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이 어려우나, 이를 회피하지말고 적극 맞서길 바란다. 우주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 없듯이, 단조로운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만약 <교우 관계>가 없다면 우리 인생에서 어떠한 기쁨도 행복도 있을 수 없단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자신을 좋아해서' 자기만 바라보는 게 아닐세. 실상은 그와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는 통에 자기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거라네. 타인을 믿을 수 없다고 호소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

만약, 나도 못 믿고 타인도 못 믿는다면 우리는 <교우관계>를 맺지 못할 걸세. 대신 자네는 일을 통해 소속감을 얻으려 하겠지. 일에서 성과를 거둠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할 거야. 그러나 원칙적으로 말하면, 일을 통해 인정받는 것은 자네의 '기능'이지 '자네'가 아니야.


우리는 어떠한 부정적 상황에서도 자신을 먼저 믿고 항상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생각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타인을 잘 이해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지만,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서로를 믿을 때 교우관계를 잘 맺을 수 있으며, 그 때 비로소 '공동체 감각(social interest, 사회에 대한 관심이나 타인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그 공동체 감각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핵심 요소가 된단다. 이러한 공동체 감각을 키우기 위해 아들러는 가장 먼저 <자신과의 전쟁>에서 벗어나길 거듭 권한다.


 

그리고 만약, '누가 나를 신뢰하고 나와 교우 관계를 맺으려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면, 그것은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을 아들러는 <과제의 분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에게 어떤 태도로 나올까?'등을 생각하는 것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타인의 과제>이니 전혀 개의치 말라고한다.  다만 마음을 넉넉히 갖고 타인을 먼저 존경하고 신뢰할 것, 뭔가 받는 것만 기다리지 말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타인의 과제를 신경쓸 것이 아니라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의 인간관계와 내 이웃에 좀 더 마음쓰기 정도란다.


대단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셋째.  기적으로 '나의 행복'을 바라는 것도 아닌, 이타적으로 '너의 행복'을 바라는 것도 아닌, 나눌 수 없는 '우리의 행복'을 쌓아 올리는 <사랑의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인간에게 사랑이란 에 의해 정해지는 것도, 자연 발생인 것도 아니란다.

사랑은 '의지력'을 발판 삼아 아무것도 없는 곳에 쌓아 올려야 하는 것이니 <사랑의 과제>는 늘 어렵고 힘들다고 말한다.


또한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란다. 인간이 어떤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나 정복욕을 갖는 것과 비슷한데, 다만 살아있는 인간이 그 대상이다 보니 물건과 다르게 '운명'과 같은 낭만적인 이야기를 엮고 싶어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히려 아들러는 두 사람이 맺어진 후의 '관계'에 주목한다. 

가령 불같은 사랑을 해서 결혼에 골인한 사람의 최종 목표가 결혼이 아니듯이 말이다. 결혼은 진정한 의미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시험받는 출발점에 불과하니, 타인에게 사랑받는 기술보다도 '타인을 사랑하는 기술'이 진정 필요함을 역설한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네.
'우리는 의식적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무의식 중에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행동에 나서고, 이쪽이 사랑을 하면 사랑을 받는 상대의 마음에도 사랑이 싹트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이다.' 라고.

예를 들면 상대의 호의를 무심코 눈치챈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신경 쓰이고 차츰 좋아지게 되네. … 이는 비록 이쪽의 착각이라 할 지라도, 어쨌든 사랑받는다는 보증이 확보된 상태라네.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우리는 이 보장을 바탕으로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지.   
한편, 프롬이 말하는 '사랑한다는 것'에는 이러한 보장이 전혀 없네.  상대가 이쪽을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라네. 사랑에 몸을 던지는 거지. 왜 인간이 사랑에 보장을 바라는지 알고 있나?

'상처받을 게 빤해.' '틀림없이 비참한 기분을 느낄 거야.'라고 절반은 확신하기 때문일세.  ……  '나는 잘난 데가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누구와도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보장 없는 사랑은 시작하고 싶지도 않다.' 이건 전형적인 열등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발상이라네. 과제를 해결하지 않는 핑계로 자신의 열등감을 들고 있으니까.  <과제를 분리>하게. 사랑하는 것은 자네의 과제야.
상대가 그 사랑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는 '타인의 과제'라네.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제를 분리하고, 자신이 먼저 사랑하는 것, 그것뿐일세.


아들러는 말한다. '네가 사랑해주면 나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자기중심적 욕구라고.  이 욕구에 응해주는 것은 부모의 사랑, 특히 어머니의 사랑밖에 없단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명의 상대'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운명의 상대'라는 있지도 않을 이상형을 들먹이면서 의미 없는 만남을 특별한 관계로 발전시킬 용기, 즉 말을 걸든지, 편지를 보내든지 하는 '상당한 용기'를 내지 않고 있단다. 그저 우리는 관계 맺기에서 도망치고 있으며, 가능성 속에서만 살고 있고, 행복은 저 편에서 찾아오는 것이라고 마냥 생각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의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을 보고 결혼을 결심할 것이란 말인가?

아들러는 결혼이란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말이다. (독특한 이론이다. 긍정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와 만나서 운명을 느끼고 그 운명에 따라 결혼을 결심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믿기로 결심한 것' 뿐이라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했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결심이고 결단이고 약속이다.'  ……
진정한 사랑을 맺기로 결심을 하고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와 마주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어떤 상대와도 사랑할 수 있어.

우리에게 운명의 사람은 없거니와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서도 안 되네.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배우자와 함께 걸어온 긴 세월을 돌아봤을 때 거기에서 운명적인 무언가를 느낄 수는 있겠지. 그런 경우에 운명이란 사전에 정해진 것이 아니네.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것이겠지. 운명이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우리는 운명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네. 운명의 주인이어야지. 운명의 상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네.

자네는 지금 인생이라는 무도회장 벽 앞에 서서 그저 춤추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네. '이런 나와 춤을 출 사람이 있을 리 없어.'라고 단정 짓고, 마음속 어딘가에 운명의 상대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 더 이상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보호하면서...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겠지.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온 힘을 다해 춤을 추게. 운명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네.


그는 경고한다.

혹시 우리의 바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내가 더 '행복해지고 싶다'가 아니라, 보다 더 간편한 '편해지고 싶다'가 아닌지.


사랑의 관계는 그 앞에 즐거운 일만 놓여있는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책임과 괴로운 일, 예기치 못한 고난이 있음을….  그 고난이 닥쳐도 이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걸어가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단다. 그렇게 사랑할 용기를 내서 타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될 수 있고, 진정한 자립과 더불어 공동체 감각에 도달할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행복이란
그 자리에 머문 채로는 향유할 수 없다.
걷기 시작한 길을 쉬지 않고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용기를 잃고,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가려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길.


아들러는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와 같은 '생의 과제'를 직시하고, 미움을 받더라도 '용기'를 내어 맞닥뜨린 후, 현재의 자신을 사고의 중심에 두고 앞으로 걸어나아가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 말한다.  


기억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시간이 유한한 이상 모든 인간관계는 '이별'을 전제로 성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만남과 인간 관계에서 오직 '최선의 이별'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뿐이네.
언젠가 헤어지는 날이 왔을 때 '이 사람과 만나서 함께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라고 납득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말이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과제들을 회피하지 말고 그것들을 정면으로 통과할 것. 그래야만 인간은 독립적인 인격체로 성장가능하고, 궁극적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아들러!


때로 우리는 '타인의 과제'까지 싸매고 걸어가면서 힘들어서 용기를 잃고, 앞으로 걷던 걸음을 멈춰 의기소침해져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 한다면서 그런 실수는 되풀이하지 말란다.


그렇게 아들러는 우리에게, <미움받을 용기>를 내서 긍정적으로 앞에 놓인 여러 인생의 과제들에 도전을 하고, 그 과정에서 오는 행복감들을 온 몸으로 느껴보라고 쉼없이 부추기고 있다.

분명 <미움받을 용기>는 인생에서, 우리의 허전한 옆구리에 끼어두었다 때때로 꺼내 써야 하는, 비장의 무기 그 어디쯤이다.






1년 전 즈음. 퇴근길 서점에서 '미움받을 용기'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오른다.

 '미움받을 용기라… 왜 굳이 미움을… 미움을 받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게 시작됐다, 아들러와의 만남은.


그 이후 별 것 아닌 듯한 그의 이론은 신기하게도 내 머릿속에 살아서 휘리릭, 중요한 순간에 휘익, 그렇게 내 마음을 움직였다. 선택을 해야 하는 어떤 순간, 조금씩 마음을 열고 전진하게 만든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아쉬웠던 점은 <미움받을 용기> 1, 2편 둘 다 책의 내용 구성이 좀 산만해 집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살 것인지'와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니 유의미한 책이라 하겠다.



그럴 때가 있다.

한없이, 깊이도 폭도 알 수 없게 우울감에 젖어들 때 말이다.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여겨질 때,

그 어떠한 일에도 의욕이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될 때, 그때 아들러의 외침은 읽는 이의 안에서 새로운 빛을 발할 것이다.


'미움받을 용기'는 타인의 시선에서 보다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한 인간으로서 진정한 자립을 향해 나갈 수 있는 핵폭탄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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