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혜 작가의 <조식: 아침을 먹다가 생각한 것들>을 읽다가 생각한 것들
일본에서 일할 때 자주 부딪히던 상사가 있었다. 업무 스타일도 달랐지만 무엇보다도 일방통행인 커뮤니케이션에 좌절했던 기억이 많다. 그런데 그 분과 일 얘기만 안 하면 정말 잘 통했는데, 그 이유는 둘 다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회식 자리에서는 다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일 얘기를 하지 않으려 애쓰다가 화젯거리가 없어 어색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었는데, 그럴 때 그분이 해맑은 얼굴로 침묵을 깨며 대뜸 한 질문은 이렇다. "다들 아침식사 뭐 먹어?" 동료들이 일제히 "에에----?!" (나를 제외하고 다 일본인이라 이런 반응이 나온다) 하며 놀란 뒤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할 때, 나는 인정하기 싫지만 반가운 감정으로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걸 억누르고 있었다. 역시 이럴 때 나랑 잘 맞아!
가볍게 요거트만 먹는 사람, 자느라 주로 굶는 사람, 냉장고 사정에 맞춰 대충 챙겨 먹는 사람 등이 있었지만 (참고로 도쿄에 혼자 사는 사람들 중 영화에서처럼 된장국에 낫토를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분은 성스러운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듯 그 날의 기분과 선택지에 따라 달라지는 메뉴와 각각의 맛과 질감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집중하던 나는 내 차례가 되자 그에 못지않은 디테일과 열정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주문한 음식이 도착할 때쯤엔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에 빠진 두 남녀처럼 그 분과 나는 아침식사에 대한 대화에 몰두한 나머지 배고픔도, 평소에 느끼던 서먹함도 잊은 지 오래였다. 그 후로 아침에 출근해서 그분의 얼굴을 보면, 잘 구워진 잉글리시 머핀 위에 천천히 버터를 바르고 따뜻한 홍차에 우유를 넣었을 모습이 상상이 되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다혜 작가의 <조식: 아침을 먹다가 생각한 것들>을 재미있게 읽다 보니 아침식사에 얽힌 나의 경험도 새록새록 떠올라 마치 조식 테이블에 맨얼굴로 마주앉아 작가님과 서로의 경험담을 나누는 기분이었다. 이 책은 제목처럼 작가가 아침식사를 시작으로 떠올린 경험과 단상을 담고 있는데, 맛있었던 음식이나 좋아하는 조식 메뉴뿐 아니라 평소 잘 챙겨 먹지 못하는 데에 대한 죄책감, 여행지에서의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생각나는 사람 등 조식이 불러오는 기억과 이미지를 작가 특유의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술술 풀어낸 에세이집이다. [블퍼컵에 담아 마시는 모닝 카페인]이라는 글을 특히 공감하며 읽었는데, 묵직하고 큼직한 머그컵에 담긴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를 마시며 느끼는 개운함과 시원함을 이해하는 작가님과 (차)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챙겨먹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시간 혹은 챙겨줄 사람이 있다면 아침식사를 마다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아침식사는 정신없이 이리저리 치일 하루에 몸을 내던지기 전에 치는 보호막과도 같고, 여행지에서 맞는 아침은 호텔 조식이라는 옵션이 딸려올 때 더욱 감개무량하다. 단순하고 부드럽고 향긋하고 익숙한 아침의 식사는 세계 공통의 언어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냄새와 맛에 몸을 맡기느라 같이 먹는 사람과도 별로 말이 필요없는 원초적 경험. 그래서 조식은 세 끼 중 가장 단순하지만 특별하다.
+ '세계 공통의 언어'라는 말을 쓰면서 생각난 곳이 있어 소개하자면, 도쿄에 'WORLD BREAKFAST ALL DAY'라는 조식 전문 카페가 있는데 주기적으로 다양한 문화권의 아침식사를 번갈아가며 소개한다. 폭신한 팬케이크 (미국)나 뜨끈뜨끈한 국물 (태국) 등의 기본 메뉴가 있고, 기간한정으로 바뀌는 스페셜 메뉴가 있다. (이번달은 핀란드라고 한다: https://www.world-breakfast-allday.com/menu) 예전에 한국 메뉴로는 미역국이 소개된 적 있다. 메뉴가 바뀔 때마다 꽤 진지하게 본토맛을 연구하기 때문에 여행가는 기분으로 가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