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이론은 우리가 보지 않을 때 물질 입자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그 입자를 관찰하면 그 입자를 어떤 지점에서 찾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를 말해줄 뿐이죠.p55
지독한 수학둔재인 나는 관심은 있지만 계산하기 귀찮고 어려운 건 피해가려는 천성 때문에 과학에 대한 관심을 문학적 이해 수준에서만 읽고 넘겼다. 그래서 수식이 나오면 패싱하고 그저 내 맛대로 과학 서적을 읽고 이해했다. 그러니 재미있는 부분만 취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이론에 대해선 대충 넘어가서 책을 읽고 나면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가 그랬고 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의 ‘큐비즘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구하다’도 그랬다. 물리학자 김상욱의 ‘떨림과 울림’도 읽을 때는 정리가 될 거 같은데 책을 덮으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서 독후감을 써야할지 막막했다. 오히려 내가 사는 현재의 삶을 책에서 읽은 내용의 일부를 접목해서 이해하는 글쓰기를 하면 될 것 같았지만 그것도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프린키피아’는 읽으려고 책을 폈다가 곧 한 구석에 밀어놓았고 리차드 파인만의 ‘발견하는 즐거움’만 겨우 독후감을 쓸 수 있었다. 아주 재미있고 기이한 물리학자의 에세이로 읽은 그의 책은 재미로만 읽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한 인간으로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조차 이해하기 힘들고 내게 벌어지는 일,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겪는 일들의 우연성과 필연적 결과물들을 앞에 두고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퍼붓는 내가 결론을 얻지 못하면서 세상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애초부터 힘든 일인지 모른다.
물리학자인 김상욱 교수는 우리 몸도 결국은 물질이라고 했다. 피부, 뼈, 세포, 내장, 뇌, 이 모든 것의 가장 최소 단위를 쪼개다 보면 결국은 원자라는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인간을 구성하는 것도 물질이라면 덩어리로 있지만 실제로는 각각이 원자라는 입자라 아주 미세한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면 인간의 움직임을 포착할 때 입자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양자역학이란 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이론화한 것이니 이 생각은 단순히 상상으로만 그치고 말 일이다. 눈에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가 중요한 전제라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 있다고 보인다고 해서 그것의 실체를 우리가 정확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가 보고 지각한 세상은 실제로 보이는 것 그대로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또 시간은 흐른다,는 전제도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물리학자의 이야기다. 삶을 일직선으로 놓고 탄생과 노화 죽음의 순서대로 보면 시간은 흐르는 것이 맞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의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어보면 산 아래에서와 산 위에서의 시간도 다르게 지나는데 그 시간을 우린 어떻게 절대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우린 그런 복잡한 이론들은 물리학자들이나 생각하게 하고 단순하게 정형화된 것을 믿고 그에 따라 생활한다. 이렇게 보면 굳이 복잡하게 이것저것 알려고 하는 게 피로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알게 된 것, 그리고 호기심이 일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우리가 쉽게 이해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과학자이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어려운 물리학의 수식을 피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몇 개의 수식 외에는 양자를 통해서, 또 양자물리학을 통해서 우리 삶에서 우리가 흘려보내는 가치들을 철학적 접근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세계가 속성을 지닌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모든 것은 관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양자론을 통해 우리가 세계에 관해 발견하게 된 사실이라고 믿습니다.(p168)’처럼 물리학이 그저 학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지구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즉 자연과 관계 맺고 있는 것들, 그리고 순수 자연, 그 안에 있는 나, 나와 관계 맺고 있는 타인들과의 관계 같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우리의 가장 뿌리깊은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돌멩이와 나무 조각을 다루면서 사실이라고 믿는데 그저 익숙해진 것 아닌가요?p163
과학은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 진리의 담지자 같은 것은 없다는 자각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배움의 가장 좋은 길은,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발견한 것에 맞춰 자신의 정신적 틀을 재조명하면서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것입니다. p164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정보이며, 이는 우리와 세계 사이의 상관관계입니다. 우리는 이 상관관계 안으로부터 세계를 알게 됩니다.p209
그러나 사물의 총체에는 ‘바깥’이 없습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 관점입니다. 세계에 대한 모든 묘사는 내부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오직 서로를 비추는 부분적이고 내부적인 관점들만이 존재할 뿐이죠. 세계는 관점들의 이러한 상호 반영인 것입니다.p213
“우주는 변화이고 삶은 담화이다”라고 데모크리토스의 단편 115는 말합니다. 우주는 상호작용이며 삶은 상대적인 정보를 조직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한, 우리는 실재를 구성하는 관계의 그물망의 섬세하고 복잡한 자수무늬입니다.p218
그의 책에서 언급한 이탈리아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루이지 피란델로」의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카를로 로벨리 그의 책에서 ‘대상은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인 어떤 것이죠(p110)’는 피란델로의 소설에서 차용한 문장이다. 피란델로의 소설은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서 발견한 못생긴 ‘코’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보는 나와, 그리고 나를 만나는 상당히 많은 수의 타인들이 보는 내가 과연 같은 사람이냐는 질문에서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질문을 한다. “당신은 백 명의 타인이기도 했고, 십만 명의 타인이기도 했다.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날 믿으라. 놀랄 필요도 없다. 차라리 지금부터 오늘의 당신이 내일도 존재하리라는 확신이 있는지 생각해보라.(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중)”
사실 이 세상의 존재는 내가 그것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당신의 존재와 부재는 내가 당신을 ‘콕’ 집어 당신이라고 말할 때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당신을 알지 못하는 순간 당신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知와 無知 사이에서 말이다. 불교의 창시자 나가르주나의 말을 인용해 저자는 ‘나가르주나가 독립된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전문용어는 공(空)입니다. 사물은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덕분에, 다른 것의 결과로서, 다른 것과 관련하여, 다른 것의 관점에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비어있다>는 것입니다.p178’은 거꾸로 다른 것, 다른 사람도 내게서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것은 양자이론이 우리가 보지 않을 때 물질 입자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지 않으며 그저 우리가 그 입자를 관찰하면 그 입자를 어떤 지점에서 찾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를 말해줄 뿐이다(p55)에서 양자론이 A와 B, 혹은 C, D 모두가 서로 얽힘으로서 발견되고 인지되고 존재하고 부재하는 것을 말한다. 닐스 보어의 말처럼 ‘양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만이 있을 뿐이다’처럼. 그럼에도 양자는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이론이고 수많은 전자기기에서 양자물리학을 빼면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양자물리학은 어렵다. 책을 읽는 내내 무언가 잡힐 것 같고 알 것 같은데 책을 덮는 순간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또 수식으로 표현된 양자물리학의 언어는 더더욱 어렵고 복잡하고 이해불가의 언어이다. 많이 들어도 알 수 없는 언어, 그러나 존재하는 세상, 이미 내가 알고 싶어서 들여다본 양자의 세계는 수학적 체계로든 과학적 이론으로든 그 어떤 것으로도 무장되지 않은 나에겐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매력 있다.
‘마치 관찰한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현실이 바뀌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론은 관찰을 기술할 뿐 한 관찰과 다른 관찰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기술하지 않는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모호한 세상에 더해 이론은 어떤 것을 관찰할 확률만을 예측한다는 생각까지도 추가되었습니다.p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