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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Mar 26. 2024

호두나무 마당/류미연/실천문학

책 읽는 우체통

  여자가 있다. 그녀는 어리석어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서 먹는 우를 범한다. 그녀는 그 벌로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겪게 되며 아이를 기르며 어머니로서 희생을 요구받는다. 어머니는 희생의 다른 이름이고 세상의 모든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존재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 대신에 젊은 나이에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그 자식의 영달을 세상의 지고지순한 목표로 알고 살았다. 많은 어머니들은 지혜로우나 지식이 일천하고 집안의 일은 해결하고 쉬우나 밖의 일은 남자의 영역이라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사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류미연의 소설집 ‘호두나무 마당’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잡초처럼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으며 작품 밖에서 소외받는 여성과 연대하며 시대와 싸우고 가부장적인 남성적 세계에서 존재의 질문을 하고 있다. 자칫 시대에 뒤떨어진 여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이 좋은 집안에 태어나 남성과 다르지 않다는 교육을 받지 않는 이상 여전히 여성은 약자이고 소외된 존재이다. 백 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의 삶이 달라지지 않음을 알았을 때 친구를 ‘배웅’하며 더 나은 미래를 기대했던 정월희는 곽연숙의 시대를 알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고 더 나은 국가로 떠났을 곽연숙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편의 매를 피해 아들의 도움으로 집을 떠나 무녀가 된 어머니는 아들이 지닌 고통을 알지 못한 채 어머니와 자신의 삶의 무게를 짊어진 수도사인 아들의 마음을 영원히 알 수 없다. 스치는 인연들은 이 나라의 여성으로 태어나 슬픔을 내재하고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가진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불행을 목격한 자식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행복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관계를 바라보며 살지 않았기에 좋은 남편으로서의 본보기를 보여주지 못하는 게 이 나라의 남자들일까. 불행은 한 세대에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고 사람들은 말은 하지 않으나 내재하는 슬픔을 지닌 채 삶을 이어가고 있다. <캡슐 NO.311>에서 화자는 남편과의 불행했던 결혼생활의 상처를 준 여성의 이름 ‘은영’을 발견하고 과거를 떠올린다. 자신처럼 요양원에 의지할 데 없이 들어온 ‘은영’에게서 화자가 발견한 건 이미 다 타서 사라진 자신의 감정이다.      


 


 소설집에는 모두 8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백 년 전을 살았던 여성에서부터 현재 노인요양보호사를 하며 사는 여인들까지, 여성으로 이 나라에 살면서 젊음을 보내고 노년을 맞이한 여성들이 느끼는 소회가 담긴 이 소설에서는 각각이 지닌 서사가 여성이 평생을 걸쳐 겪는 삶의 부분이 있다.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았든가 내 이웃의 이야기든가 하는 이야기들은 뒷산의 대나무 숲에서 가끔씩 들리는 여성들의 아우성 같은 소리들이다.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처럼 한국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이 칡넝쿨처럼 끌려나오는 것 같다. 책을 덮으며 죽는 날을 스스로 예견했던 나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나는 어머니와 다른 삶을 살고 싶었으나 어느새 어머니를 닮은 삶과 닮은 얼굴을 하며 거울 속에서 마주하고 있다니 섬뜩하면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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