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담도암이라는 다소 생소한 암을 앓고 돌아가셨다.(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흔한 발병 암이란 걸 알았다) 사실은 암이 발병한 건 버스에서 추락한 후 갈비뼈 골절로 시작해서 뇌출혈이 왔고 뇌수술 이후 패혈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난 후 의식을 회복한 다음이었다. 암이 발병하기까지 긴 여정을 시작한 것처럼 어머니의 죽음은 연극적이었다. 어머닌 체념 상태에서 고통이 없이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감염이 원인이었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족들은 마음의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공허감에 시달렸다. 고통은 마음을 뚫고 표피를 뚫고 삶을 뚫어버렸다.
종군기자로 평생을 전쟁지역을 누비고 다녔던 마사는 자궁경부암으로 투병 중이다. 소설가인 잉그리드는 자기 책의 저자 사인회에서 마사의 친구인 스텔라로부터 마사의 투병 사실을 듣는다. 직장동료였던 잉그리드와 마사는 연인인 데이미언과 연이어 사귀었고 언제든 지적이고도 내밀한 대화가 통하는 사이다. 그러나 둘은 수년간 만나지 못했다. 영화에서는 그 이유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잉그리드는 종종 마사를 방문하고 임상실험에서 차도를 보이지 않았던 마사의 병은 점점 깊어간다. 의사는 차도가 없는 마사를 지속적인 치료받길 권하고 치료의 명목으로 끊임없이 부질없는 희망에 기대는 것에 마사는 지쳐간다. 마사는 병으로 인한 통증과 죽음이란 두려움 앞에서 희망의 끈을 붙잡고 기다리는 허망한 일을 끝내고 싶다고 결정한다. 그리고 잉그리드에서 자신의 옆방에서 자신이 죽음의 문을 넘을 때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잉그리드는 윤리적 문제와 감정적 어려움으로 거절했다가 간절하고도 단호한 마사의 부탁을 승낙한다. 영화는 마사가 결국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으로 느슨하면서도 집요하게 끌고 간다. 마사가 죽은 의자에 마사와 꼭 닮은 그녀의 딸이 어머니가 죽은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서 영화는 끝을 맺지만 영화는 사실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더 룸 넥스트 도어’는 목격자로서 존재하는 잉그리드를 말하는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마사의 행동은 정당한가. 절대적인 고통에서 인간은 무기력하고 노출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죽음 이후는 그것으로 끝인가. 살고 있는 동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였던 윤리적 고민과 상식저인 삶의 태도는 죽음 앞에서도 유효한가. 이건 영화를 본 후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영화에서는 마사의 연인이었고 그녀 딸의 아빠였던 플래너리의 죽음과 그녀가 종군기자로 활약하면서 동료의 소개로 만났던 전쟁지역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카톨릭 수사와 데이미언이 기후 위기로 수많은 사람이 생존의 벼랑으로 몰린 상황에 분노하는 상황까지 삶의 순간순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적 죽음의 상황에 대해서도 함께 그리고 있다. 폭력적 환경에서 죽음을 강요받는 건강한 사람의 죽음, 평화로운 상황에서 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 스스로를 살해한다는 의미로 정의된 자살은 위의 상황처럼 정말로 폭력적일까.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겪고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던 장 아메리는 ‘자유죽음’이란 책에서 자살을 스스로 자신을 살해한 사람이 아닌 선택의 문제, 인생을 살 만한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거짓말에 속지 않고 근원적인 진정성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살자처럼 누구보다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 공허함 속으로 메시지를 보내면서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살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는 나라는 사람의 자유의지, 그것에 대해서 비난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은 마사의 선택에도 해당된다. 스스로를 살해하는 의미로서 자살이 아닌, 죽음이 눈앞에서 촉각을 세우며 기다리고 있는 것을 그저 자연스럽게 죽기까지 그 고통을 온전히, 고스란히 느끼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철학적 문제를 던진다. 세상의 부당한 죽음을 묵도하는 우리들은 그 죽음에서 어떠한 입장인가. 마사 죽음의 방관자 겸 조력자로 잉그리드를 취조하는 기독교적 윤리관을 가진 형사의 태도는 온당한가. 마사의 선택을 지켜보는 잉그리드는 죽음의 방조자인가. 그녀에겐 잘못이 없는 걸까. 있다면 무엇이고 없다면 왜인가. 그리고 이 영화에서 마사는 딸 하나만을 두었고 그 딸과는 오랫동안 만나지 않은 사이였다. 그래서 그녀의 선택 이후 가족의 슬픔은 그다지 깊이 그려지지 않는다. 다만 나는 젊은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점에서 어떠한 죽음으로 인한 이별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체험했다.
영화에서 마사가 전쟁 중에 조력자로 만난 카톨릭수사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순결서약을 한 카톨릭사제에게 섹스는 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장에서 죽음을 시시각각으로 마주하며 솟구치는 도파민이란 호르몬에 노출된 사람에겐 섹스라는 윤리적 문제가 과연 문제가 될 수 있는지. 틸다 스윈튼의 이 영화에 관련된 인터뷰를 봤는데 세상의 부당한 죽음, 전쟁과 같은 상황을 목격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은 이웃나라의 수 많은 사람들, 그들도 ‘더룸넥스트도어’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정치영화다, 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암에 걸린 마사의 집이 원색의 쨍한 색감과 생명감이 느껴지는 과일 한 바구니의 배치와 잉그리드 집의 빈티지하고 낡은 집의 인테리어는 삶과 죽음의 상태에 있는 두 사람을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감각적인 연출로 그려진 이 영화는 그래서 여운이 오래 남는다. 이 영화는 올해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