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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Nov 19. 2024

11월의 생각

생각하는 우체통

   어영부영했더니 11월이다. 분명 어제 새해를 맞이한 느낌이었는데 그 사이 유래없는 더위를 몰고 온 여름이 끝나고 오지 않을 것 같은 가을이 왔는지 안왔는지 느낄 새 없이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있나. 분명히 내가 굵은 동앗줄로 붙잡고 있었던 것 같은 시간이 언제 나를 튕겨내고 저만치 도망갔는지, 내 이럴 줄 알았다 하면서 나를 향해 혀를 내밀고 조롱하는 것 같다. 아뿔싸, 시간이란 원래 이런 거지.


   열심히 일 년을 살았던 사람들의 성과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걸 보니 내가 멈춰있던 순간에도 붙잡은 시간을 잘 활용하고 부지런히 살았던 사람들이 있던 걸 실감한다. 매년 내가 아는 사람들이 맞아? 이렇게 큰 상을 받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많았어? 아, 그 열패감이라니. 나의 게으름과 부족함을 탓하고 부질없는 욕망만 가득한 나를 비난하는 시기다. 그럼에도 맑은 눈의 광인처럼 해맑게 다시 일 년을 다짐하며 '처음처럼'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고 다짐했건만 어느새 연말이 눈 앞에 닥친 거다. 또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다시 새로운 달려을 뜯겠지? 아참, 올해는 달력이 올 데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매해 달력을 구입한다. 선물로 받지 못하면 내가 직접 구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달력엔 1월, 2월, 3월의 기록이 빼곡했다. 그리고 하얗게 몇 달을 보낸 후 가을쯤부터 다시 달력에 빼곡하게 일정이 채워진다. 하얗게 비워진 기간 동안 나는 사실 날씨가 좋아서, 너무 더워서, 바람이 불어서, 태풍이 불어서 하루하루 그냥 그렇게 보낸 적이 많았다. 그런데 24년은 1월부터 지금까지 달력에 채워진 계획도 일정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가장 머리가 복잡한 시간을 보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이야 미뤄두고 해야 할 일을 먼저 챙기는 게 가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게으름이 가장 큰 요인이고, 다른 것들에게 전가하며 나의 할 일 목록들을 방치한 까닭이다. 11월이 되고 나서야, 아차, 싶다. 다행이라면 장면쓰기 워크샵과 같은 강의 프로그램을 수강하고 그곳에서 한 편의 짧은 단막극을 완성한 게 유일한 성과다. 여행을 다녀온 것도 포함시켜야 할까.


   친구가 24년에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며 '예술가'라고 했다. 20년 가까이 도자기를 빚었고 그녀만의 색채가 분명한 작품을 만들고 있으니 예술가가 맞다. 나는 한번도 나를 예술가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진을 찍고 전시회를 하고 글을 쓰고 상도 받았고 연극을 해서 무대에도 서봤지만(물론 이건 아마추어 연극이었지만) 나는 유명하지도 않고 이름이 거론된 적도 없다. 늘 재능이 넘치는 사람들 앞에서 작아진 나를 발견할 뿐이었다. 11월, 12월은 타고나지 않은 것에 대해 늘 쪼그라든 나를 발견한다. 물론 이름이 알려진 이들의 열정과 노력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손을 잃고서 발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본 적 있고 무명의 긴 세월을 묵묵히 자신이 하는 예술 장르에서 일하고 배고픔의 시간을 견뎌낸 수 많은 예술가를 봤기 때문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달이 바로 11월이다. 그래서 생각이 많아지는 달이기도 하다. 아, 나태하고 게으른 나의 성정이라니.


   친구는 집 안 가득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쌓아갔다. 몇몇 작품은 팔기도 하고 주변의 친구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하고(덕분에 나도 그녀의 작품을 갖고 있다) 여전히 도자기를 빚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그녀의 작품 사진이 올라오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작품에 찬사를 보낸다. 애초에 상업적 목적을 두고 작품을 만들지 않았으니 그녀는 작품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그런 태도가 무척이나 부럽고 존경스럽다. 유튜브에서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서 프랑스의 피아니스트와 협업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김연아 양의 동영상이 몇 번이나 알고리즘을 타고 나에게 떴다. 행복하게 즐겁게 연주하는 아이의 얼굴, 너무나 아름다웠다. 댓글에 어른의 도구가 되어 망가져 버린 한국의 많은 천재들처럼 되지 말라는 당부의 글과 소녀의 대단함을 칭송하는 댓글까지 수많은 글이 올라왔다. 그녀의 천재성도 대단하지만 행복하게 연주하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았다. 행복한 사람의 얼굴은 그것으로 매력이 된다. 그녀의 연주가 더 매력적인 것은 그 시간을 즐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 생은 글렀을지 모르겠다. 속절없이 나이는 먹고 어제 읽은 책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고 단어가 기억나지 않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밖으로 나오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글로 풀어내지 못하면 내 유전자에 새겨넣으면 될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않나? 유전자란 조상으로부터 받은 수 많은 데이터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뜨고 다시 태어날 곳을 찾는 영혼들의 여행지일지. 다음 생에서 마치지 못한 지금 생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지. 아니면 평행이론의 어떤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마침표를 찍은 다음 필기구를 내려놓고 그 완성도에 흐뭇하게 웃고 있을지. 어쨌든 11월은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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