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믐으로 향한 우리들의 재즈
헤이리의 여름
- 그믐으로 향한 우리들의 재즈
한 곡조의 피아노 연주가 끝나면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곤 했어요 음악을 경청하는 동안 잠시 놓았던 손을 다시 잡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라는 낱말이 제법 잘 어울렸던 것 같아요
암전이 시작되고 서서히 연분홍으로 물든 무대가 켜지면 맨 먼저는 건반이 움직이곤 했지요 사랑이 처음 싹트던 때를 회상하는 느린 가락에서는 항상 벚꽃이 흩날렸던 기억일 뿐이었어요 어느덧 환한 연초록빛이 등장하곤 했어요 가느다란 색소폰의 날렵한 음들이 매 순간들을 장식하고 그때마다 서로를 향해 웃던 게 기억나요
대화들이 움직였지요 한 마디씩 힘겹게 이정표들을 쌓고 가볍게 일렁이는 춤사위에서 차곡차곡 일기들을 써 내려갔어요 각자의 일기들 속에서 한때는 나, 한때는 너였던 우리는 키들의 높낮이에 맞추어 밤하늘을 여행하는 동반자로도 충분하였던 시절들
또다시 불협화음처럼 도착한 낯선 장소에서 때로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본 게 기억났어요 어쩌지, 하면서도 응원을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고요 큰 비라도 맞닥뜨렸던 날엔 함께 우산을 쓰는 게 더 괜찮았을 걸 하며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지만요 그렇게 우린 헤어졌을 뿐이에요
십삼 년의 달력을 내내 넘기던 곡조가 비로소 멈추고 텅 빈 무대 한가운데뿐인 지금, 늙음의 방식들로 치장한 두 개의 왕관이 무대 위에 천천히 올라섰어요 마지막 한 소절의 피아노 선율이 귀결처럼 흐르는 동안
- 잘 지냈어
잘 지내요,
이윽고 침묵에 휩싸이면
우리가 함께 날아오른 곳, 말갛게 그믐달이 뜨고
지나간 오천 개의 달들도 어렴풋이 생각났어요
그 달들의 흔적을 좇아 모처럼 여행을 한 기분
그대는 또 손을 잡아요
약속이 아닌 믿음
그믐은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 단정, 20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