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해
이마, 볼, 턱 가리지 않고 (심지어 콧구멍 속에도) 돋아나며 날 괴롭히는 뾰루지의 원인이 무엇인지.
마감이 임박한 에세이와 시험 때문인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잠시라도 시선을 떼면 부딪치고 구르는) 아기 때문인지,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출산 후유증으로 처방받아 복용 중인 호르몬제 때문인지. 아마 이 모든 게 원인일 거다.
이렇게 힘들 줄 미리 알았다면 무모하게 덤벼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사서 고생의 늪에 발을 디뎠을까 자책하려던 찰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우리 부부가 준비해온 지난 4년이 떠올랐다.
우린 흙수저다. 아기와 함께 유학을 떠난다는 모습만으로는 재정적으로 풍족할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우린 양가 부모님께 기대지 않고 최대한 우리 힘으로 공부하기 위해 4년이란 시간을 준비해왔다. 사실 나보다 먼저 유학을 꿈꾸고 원했던 이는 신랑이었다.
학부 때부터 장학금과 각종 아르바이트로 학교를 다녔던 그는 교수님의 배려로 석사과정까지 장학금을 받고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 장남으로의 무게 때문에 졸업 후 바로 취업한 그는 첫 직장생활을 통해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직장생활과 박사과정을 병행하다 결국은 퇴사하고 풀타임 학생이 되었다. 코스웍을 수료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다 날 만났다. 부족한 형편으로 학창 시절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은 꿈도 꾸지 못했다며, 학위를 받으면 해외로 나가 더 넓은 세상에서 연구 경험을 쌓고 싶다고 했다. 그와 연애하는 동안, 유학생과 유학생 와이프로 (당시에는 일 순위 고려 대상이었던 미국에서) 우리가 함께하는 삶을 그려보곤 했다. 물론 유학생의 현실은 무척 고단하겠지만, 한참 서로에게 푹 빠져있던 우리는 함께라면 불구덩이여도 행복할 거라 생각했다.
결혼 후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해서 떠나기로 약속했다. 신혼집은 분리형 원룸 전세로 시작했다. 대부분 빚이었고, 금방 준비해서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가구도 사지 않고 가스레인지,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가 모두 구비된 풀옵션으로 입주했다. 심지어 공부에 방해된다고 텔레비전, 소파도 사지 않았다. 유학자금을 모으기 위해, 당시 맞벌이였던 우리 부부는 월 200만 원씩 저축했다. 그 말은 즉, 내 월급의 대부분은 저축(이라 쓰고 대출 상환이라 읽는)하고 신랑의 월급으로 용돈과 생활비를 나눠썼다는 뜻이다. 자동차도 사지 않았고, 관리비 3만 원에 전기요금 상하수도 요금 모두 합쳐도 만 원이 안 되는 작은 집에 살았다. '가자가자 유학'이라 이름 붙인 외화통장도 만들어 놓고 여윳돈이 생기면 달러, 파운드를 사서 넣어뒀다.
목표가 있기에, 그리고 당시엔 아기가 없어서 목돈 들어갈 일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앨리자가 말했듯,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한두 해 안에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4년이나 걸렸으니.
세상이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랑이 아닌, 내가 유학생이 되었다 (여보 미안하고 고마워). 인생이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내 옆엔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천사가 있다. (역시 잘 때가 제일 예뻐!)
왜 나는 영어를 못하는 거야! 왜 당신은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는 거야! 왜 우리는 돈이 없는 거지?
우리가 지난 몇 년간 꿈꿔오고 준비해온 자리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잊어버리고 불평하는 내 모습이 참 못났다.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더 나이 들기 전에 아이도 낳고 공부도 할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해야지. 다시 한번 내 멘탈에 주문을 건다. 버티면 시간은 간다. 시간이 가면 졸업은 한다.
우리가 5년 후 이 시간을 되돌아볼 때,
그때 우린 겁도 없이 도전했었고,
그래도 어떻게든 해냈다는 위로를
서로에게 건네길 소망한다.
오늘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게 건넨 신랑의 편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