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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May 27. 2018

제발 내게 집을 다오

제네바에 우리 가족 몸 누일 곳 하나 없단 말인가



우리 엄마는 세상에 나만큼 순한 아기가 없었다고 했다. 잘 울지도 않고, 가만히 혼자 놀다 자고, 아주 순둥순둥했다고. 집안일하다 뒤돌아보면 보행기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고, 한번 낮잠을 자면 금방 깨는 일도 없어 재워놓고 가까운 시장도 다녀올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파서 열이 올라도 잘 울지 않는 아기였다고 (모든 아기가 그런가요? 우리 아기는 미열 있으면 울던데).


타고난 기질인 건지 커서도 운 기억은 많이 없는 것 같다. 학창 시절에도 친구들이랑 싸운 적도 없었고, 시험을 못 봤다고 운 적도, 졸업식 때 헤어짐이 아쉬워 운 적도 없다. 장기간 해외생활을 하러 출국할 때도 아빠와 엄마와 동생은 울어도 난 울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모험을 앞두고 설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인지라 감동적인 영화를 볼 때 눈물을 훔치거나, 슬픈 소설을 읽을 때 클라이맥스에서 눈물 흘리기는 한다. 그러나 화가 나서, 분에 못 이겨, 서운하고 억울해서, 스트레스받아서 우는 경우는 2~3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멘탈이 무너질 때 교회에서 기도하다 남몰래 우는 경우는 가끔 있었지만. 


30여 년 짧은(?) 인생을 살며 눈물 흘릴 일이 많지 않던 내가 

엄마가 되고 홀로 유학을 떠나고는 작은 일에도 눈물부터 흘리는 울보가 되었다. 





종강을 앞두고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우리 가족이 지낼 안락한 집 계약을 마치고 학기를 멋지게 마무리한 후 크리스마스이브에 맞춰 신랑과 아기 앞에 짠! 하고 나타나야 했다. 그리고 12월 25일에는 우리 아기의 유아 세례식에 참석하고, 1월 한 달간 한국에서 아기와 알콩달콩 지내고, 2월에 아기를 데리고 제네바에 와서 우리 집에 착! 정착을 해야 했다. 이게 우리가 그린 큰 그림인데, '집을 구한다'는 첫 단계부터 틀어져버렸다. 


열흘에 한 번씩 기숙사 행정실의 사만다를 찾아가 계약 취소된 아파트가 있는지 물어본 지 네 달째가 되었다. 늘 사무적인 태도로 유감이라는 말만 하던 사만다가 방 두 개짜리 아파트가 났는데 혹시 이거라도 들어갈 생각이 있는지 물어왔다. 방 두 개짜리는 좀 과한데..라는 생각으로 한 달 렌트가 얼마인지 물어봤다. 2500 스위스프랑. 당시 환율은 낮게 잡아도 1120원 정도 할 때였다. 한화로 280만 원. 

그.. 그렇다면.. 아무리 아껴 생활비를 100만 원에 맞춰 쓴다 해도 최소 한 달에 380만 원은 있어야 한다는 건데.. 매 학기 학비 450만 원까지. 게다가 신랑이 한국에서 직장 생활하며 쓰는 기본 생활비가 있기에, 최소한 세후 급여가 500만 원은 되어야 결혼 후 4년간 우리가 피땀 흘려 일해 모은 전세금에 손대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거다. 아무리 집을 기다려 왔다 해도 선뜻 "응, 그 집 내가 할게!"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헉..."하는 긴 한숨만 내뱉을 뿐.


아무래도 그건 너무 비싸서 안될 것 같다고 거절한 그다음 주 주말,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가족 기숙사에 사는 친구네가 다른 데로 이사 간다는데, 사만다에게 확인해봐!"

희망을 품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사만다에게 찾아가 물었다. 

"내 친구의 친구가 이사간다던데, 기숙사 자리 나는 거지?"

"아니, 난 모르는 얘기야."

"(당황) 그럴 리가.. 이사 간다는 소리 들었는데, 다시 한번 확인해 봐."

"아니, 기숙사에 남는 아파트는 없어."


단칼에 희망을 꺾어버리는 그 말에 그동안 쌓여온 감정이 폭발했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한국에 가서 아기를 데려와야 하는데, 한겨울 제네바에 우리 가족이 지낼 곳이 없는데, 매일 밤 아기 사진과 동영상 보면서 우는 것도 이제 그만하고 싶고, 분명히 이사 간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혹시 다른 사람한테 집 넘겨 주고 나한텐 없다고 하는 거 아니야? 


결국 사만다 앞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단순히 집 때문에 운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아기도 신랑도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공부도 언어도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두세 달이 지나면 적응될 줄 알았는데 좀처럼 상황은 변하지 않는 데다, 모든 걸 내가 짊어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불안감, 서러움까지 복받친 눈물이었다. 


'그래도 네가 대기 1순위니 걱정 말라'며 위로하는 사만다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내 방으로 올라와 짐을 정리했다. 그냥 첫 학기만 마치고 짐 싸서 한국 들어갈까 생각했다. 아무도 내게 루저라 욕하지 않을 거다. 그저 '그럼 그렇지, 애엄마가 유학은 무리일 줄 알았어'라고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진 것도 같았다. 마음을 다잡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일단 학기만 무사히 마치자. 





그 후 기적처럼 내겐 집이 생겼다. 방 하나 거실 하나 있는 커플 아파트에 살고 있던 부부와 아기가 계약일보다 한 달 정도 일찍 귀국하게 됐다. 그리고 집을 넘길 대상으로 나를 지목해 행정실에 통보했다. 봄학기가 시작하는 2월부터 입주가 가능했고, 딱 내가 원하던 사이즈의 (= 금액의), 학교에서 3분 거리의 기숙사 내 커플 아파트였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는 10년 전 유행한 책처럼 (연금술사 구글 이미지 검색)



이번 일로 내가 깨달은 것은

세상에는 내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조급해하고 스트레스받는다고 해서 상황이 쉽게 변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것. 그렇기에 나의 통제 밖에 있는 일 때문에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지 말고, 내 상황을 제삼자가 바라보듯 여유를 갖고 대해야 할 때도 있다는 거다. 

실제로 내가 집 문제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도 이곳에 오래 사신 분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그러셨다. "집은 있으니까 걱정 말라"라고. 그 말이 바로 정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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