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넘어 떠난 스위스 유학 첫 학기 멘붕 극복기
늦깎이
1) 나이가 꽤 들어서 어떤 것을 시작하거나 성공한 사람
2) 남보다 사물의 이치를 늦게 깨달은 사람
(출처: 다음 국어사전)
나는 백일 된 아기를 한국에 두고 온 매정한 엄마이자, 남편 펀딩 받아 공부하는 maintenance cost 많이 드는 와이프, 영어도 못하면서 패기 있게 유학을 선택한 무모한 학생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사람 살리는 일을 하겠다고, 내 아기는 한국에 있지만 엄마는 개발도상국의 아기들을 살리는 공부를 하겠다고 호방하게 출국했다. 하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마음먹은 대로 술술 풀릴 리 없었다.
오리엔테이션 첫날, 대강당에 입학생 모두가 모여 앉았다. 우리 학교는 학부는 없고 석사, 박사 과정만 운영하기 때문에 전교생이 800명 정도로 적은 편이다. 다양성을 위해 대륙별 쿼터를 고려하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다양한 국적, 인종, 백그라운드를 가진 친구들이 모인다. 마치 작은 UN에 와 있는 듯 다양한 억양과 발음의 영어를 경험할 수 있다. (나의 순수한, 토종 오리지널 한국인 영어를 포함하여..)
그나마 좀 말 붙이기 편해 보이는 동양 여자아이들 옆에 가서 앉았다. 홍콩, 중국 친구들이었다.
- 안녕! 어느 과 신입생이니? 어디에서 왔니? 제네바는 어떻니? 어디에 사니? 불어 수업은 괜찮았니?
여기까지는 할 만했다. 오호, 출산과 육아로 뇌 작동이 멈춘 줄 알았는데, 아직 녹슬지 않았군!
속으로 기뻐하며 연단에 오른 입학 담당자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귀를 열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귓구멍도 후벼보았다. 담당자가 뭐라고 말하자 나를 제외한 모두가 웃었다. 당황스러웠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려고 오리엔테이션에 왔는데, 여기서 하는 말을 못 알아들으면 이제 난 학교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수업은 알아들을 수 있을까? (물론 알아들을 수 없었다) 교수님의 농담에 모두가 웃으며 화기애애한데 나는 애써 어색한 미소로 당황스러움을 감췄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가 말 걸까 무서워) 기숙사로 돌아와 무너진 멘탈을 다잡으려 애썼다. 큰일이었다. 집 구하기고 가족 초청이고 뭐고, 일단 학교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들리질 않는데 말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영어 공부 좀 더 하고 올 걸 그랬다. 이런...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수도 있기에 내가 한 학기 간 지키려 노력한 몇 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첫 학기부터 욕심내지 말자. 수업 시수를 줄인다.
- 지인의 조언이었다. 첫 학기는 적응이 필요하니 한 과목 정도 덜 수강하는 게 낫다는 것. 그래서 남들 5개, 6개씩 들을 때 나는 4과목만 수강했다. 학기말이 되니 페이퍼 마감에 시험까지, 모두가 허덕거렸다. 나도 힘든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잘했다고 생각하는 신의 한 수.
주어진 리딩 과제를 최대한 읽어간다.
- 양은 너무 많은데 내가 영문을 읽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다 못 읽었다. 그나마 읽은 것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내 것으로 정리해두기도 전에 수업시간은 닥쳐왔다. 토론할 거리를 준비해가도 끼어들어 내 주장을 펼치긴 어려웠다. 이건 시간이 지나고 트레이닝이 되어야 해결되지 않을까.
모든 강의는 녹음을 하고 다시 듣는다.
- 안된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집에 와서 다시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나중에는 특별히 잘 못 알아듣는 과목(경제학, Theory 수업)만 녹음해 다시 들었다.
가까운 문화권의 친구들부터 공략한다.
- 주로 중국, 일본, 홍콩, 싱가포르, 인도, CIS 국가에서 온 친구들. 대부분 영미권에서 학부를 마쳤거나 영어가 모국어처럼 편한 친구들인데 한국 드라마와 한국 음식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일까, 문화권의 특징일까, 아님 그냥 애들이 착해서일까, 나의 저질 영어에 좀 더 너그러웠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한다.
- 장보고 밥하고 빨래, 청소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이야! 밖에 나가 사 먹는 비용이 너무 비싸서 세끼 밥은 꼭 해 먹었다. 점심시간에도 기숙사 와서 밥 먹고 다시 나가기도 했다. (학교와 기숙사는 3분 거리) 다른 신입생들은 네트워킹한다고 파티도 가고 스위스 탐방도 하는데 나는 그럴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멘탈을 꽉 붙잡는다! 내가 힘들면 남들도 힘든 거다.
- 처음 두어 달은 이걸 몰라서 좌절을 많이 했다. 남들에겐 쉬워 보이는데 내겐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수십 차례 (내가 이러려고 남편과 아기까지 두고 왔나)... 나중엔 다른 아이들도 공부할 양이 많아 힘들어한다는 걸 알고 (+ 영어가 모국어인 아이들도 중간고사에서 낙제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상황을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어찌 되었건 버티다 보면 시간은 흐른다는 진리.
공부와 별개로 내게 가장 큰 고통은 아기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기와 떨어져 있지만 내 몸, 내 호르몬은 아직 출산과 육아를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진 바쁘게 하루를 보내느라 잠시 잊고 있다가도 저녁 먹고 책상 앞에 앉으면 눈 앞에 아기가 아른거리고 옹알옹알하는 소리, 까르르 웃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잠자리에 누워서는 휴대폰에 저장된 동영상이며 사진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고, 품에 꼭 안아주고 싶었다. 아기와의 스킨십이 너무 그리웠다. 길을 걷다가도 아기를 연상케 하는 무언가를 보면 울컥했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만 봐도 내 아이의 미래 모습이 상상되곤 했다.
그러나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 따위 내겐 없었다. 내게 허락된 시간은 3개월. 그 사이에 가족들이 지낼만한 안락한 집을 구해야 했다. 국제기구들 때문에 드나드는 단기 체류자들이 많아 주거난이 심각한 (집도 부족하고 월세도 어마어마하게 비싸고) 제네바에서, (1) 적당한 가격에 (2) 아기가 기어 다녀도 위험하지 않은 (3) 깨끗한 집을 (4) 학교와 가까운 곳에 구하는 것! 내게 주어진 미션이었다. 이곳에 오래 거주한 이들은 입을 모아 얘기했다. "그런 집은 학교 기숙사밖에 없다"라고.
열흘에 한 번씩 기숙사 행정실에서 근무하는 사만다에게 찾아가 물었다.
- 집 계약 취소된 거 없나요? 가족 기숙사 자리 안 났나요?
나중엔 내 얼굴만 봐도 사만다가 딱하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도 우리 가족이 지낼 집은 없었다. 그렇다고 한겨울에 8개월 아기를 데리고 아무 데나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종강이 다가올수록,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