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전 아기와 보낸 백일의 시간
출산 후 백일은 몸이 가장 힘들 때라고 한다. 산모도 출산에서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고, 초산일 경우 신생아를 케어해본 경험이 없어 서툰 데다, 신생아는 밤낮없이 자주 깨고 자주 먹어야 해서 산모가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골반 통증이었다. 골반이 열려있는 느낌이랄까, 엉덩이 위쪽 뼈가 벌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잠시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안아달라고 보채는 아기를 안으면 안 그래도 무거운 내 체중에 아기의 체중(우리 아기도 빅베이비였으니까)까지 더해져 골반이 무너지는듯한 통증이 왔다. 임신 전에도 나는 배가 아픈 생리통보다는 골반 통증과 엉덩이 뒤쪽, 꼬리뼈 위쪽의 움푹 파인 부분(명칭 아시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세요)이 욱신거리는 게 힘들었는데, 출산 후에는 원래 약했던 부분이 더 약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젖몸살, 오 마이 갓. 산후 검사받고 철분주사도 맞았는데도 철분 부족인 건지 아니면 유축만으로는 젖을 깨끗하게 비우기 턱없이 부족해서인지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갑자기 두통이 오면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고 누워만 있어야 했다. 아기는 뒷전이었다. 일단 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으니까. 타이레놀을 먹고 자야만 머리가 좀 맑아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빈혈 증상이 아니었나 싶기도. 어쨌든 젖이 차오르면서 오는 심한 두통은 이른 단유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좁은 집안에 하루 종일 갇혀 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리원에서 나와 바로 지방에 있는 친정으로 갔다.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마치고 집으로 왔는데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다세대주택 4층이었다. 호기롭게 구입한 12킬로그램짜리 디럭스 유모차와 4킬로그램 남짓한 아기, 기저귀 젖병 가방까지 싸들고 혼자 도저히 오르내릴 수 없었다. 출근한 신랑이 퇴근해 집에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집 앞 슈퍼마켓이라도 나갈 수 있길 고대하며.
분유 타서 먹이고 트림시키고 안아주다가 재우고 그 사이 나도 후다닥 고추장에 밥 비벼 먹고, 다시 깬 아이를 어르다가 분유 타서 먹이고 트림시키고 안아주다가 재우고 젖병 삶고, 다시 아기를 먹이고 트림시키고 안아주고 재우다가 나도 졸고... 이걸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신랑이 퇴근해서 왔다. 번갈아 아기를 안으며 밥을 후다닥 해치우고, 저녁에 목욕시키고 다시 안아 재운다. 어른들은 손탄다고 안아주지 말라고 하셨으나, 안아줘야 아기가 울음을 그치는데 어떻게 안 안아주고 재울 수 있나요? (진심으로 궁금) 아기는 거의 두 시간마다 배고프다고 팔을 휘저으며 깼기 때문에 밤에도 불침번을 서며 먹이고 재워야 했다. 다행히 우리 아기는 밤엔 배만 부르면 안아주지 않아도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근데 새벽 6시면 기상하는 건 좀 그렇지 않니)
50일이 되자 조금 살만해졌다. 여전히 밤에 두세 번은 깨서 먹이고 15~20분 정도 안고 있으면서 토닥여 트림시키고 재우기를 반복하는 일과였지만, 적응이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기가 엄마를 알아보고 미소 짓거나 옹알이를 하는 듯 리액션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아기와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지기 시작했고, 그 미소에 나의 고생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생후 60일부터는 가까운 곳은 유모차로 외출하기도, 가끔은 신랑과 외식을 하기도, 집 근처로 와준 친구들과 만나기도 했다. 두 시간마다 우유를 먹어줘야 하는 아기 때문에 한번 외출할 때마다 짐이 엄청났지만 (보온병, 젖병, 분유팩, 물티슈, 가재 수건, 기저귀 등등), 그래도 바깥바람을 쐴 수 있다면 견딜 수 있었다. 스위스로 출국하기 전 내게 주어진 100일간 아기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열심히 사진 찍고 영상도 찍어 가족들과 공유했다.
힘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종류의 통증과 피곤함이었고, 내 몸 하나 온전히 건사하기도 어려운 내가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도 부담스럽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좁은 방 안에 갇혀 있는 것도, 하다못해 내 밥 챙겨 먹고 살림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나 내겐 100일이라는 한정된 기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모든 걸 참아내게 했다. 끝이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매 순간이 소중하고 애틋했다. 반대로 출산부터 100일, 이후 끝이 보이지 않는 육아의 길로 들어선 엄마들은 얼마나 힘들고 우울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출국을 며칠 앞두고, 지방의 친정에 아기를 맡기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남몰래 울었다. 일 년 전만 해도 아기는 거들떠도 안 보던 나였다. 결혼은 했어도 아이 생각도 없었고, 갑자기 생긴 아이여도 내 커리어는 지키겠다던 나였다. 아기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니 내 아이도 부모님께 맡기고 출국할 수 있을 거라 호언장담하던, 그런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아플 줄은 몰랐다. 모성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믿었는데, 대체 난생처음 경험하는 이 감정은 모성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도 참을만하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한 학기만 스위스에서 혼자 보내고 방학에 다시 돌아올 거니까. 이번에도 끝이 보이는 여정이니 견딜 수 있을 거야. 지금 잠깐만 울고 털고 일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