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격려를 받았다
(지난 이야기)
육아를 도와주러 스위스에 오셨던 친정엄마가 비자 기한 만료로 귀국하신 후 5월 한 달간은 아기와 둘이 지내며 유학 두 번째 학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아기는 이곳에서 엄마와 단 둘이서 첫 생일, 돌을 맞이했다. 남들 다 하는 그 흔한 돌잔치, 돌상도 차려주지 못했고, 돌잡이도 못했고, 스튜디오에서 돌사진도 찍어주질 못했다.
아기를 봐주러 오는 친구에게 맡기고 수업 가는 2시간을 제외하고 새벽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아기와 온전히 함께하는 하루. 아기를 재우고 집을 치우고 새벽 1시까지 과제와 공부를 했다. 목, 어깨, 허리, 손목 안 아픈 곳이 없었고 피로로 어지럼증이 올 때마다 혹여 병날까 싶어 악착같이 끼니를 챙겨 먹었다.
남편은 신혼집을 처분하고 본가에 들어가 살면서 평일 저녁, 주말도 없이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돈을 벌지도 못하면서 렌트만 월 200만 원을 내면서 아기 키우고 공부하고 있었다. 인건비가 높은 스위스에서 베이비시터 비용도 큰 부담이었고, 육아를 도와주러 스위스까지 와줄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때로는 나 자신을, 때로는 한국에 있는 남편을 원망하면서 서서히 멘탈이 무너져가고 있던 중...
학기말 과제들의 마감기한과 다음 연도(2018-2019)를 위한 장학금 신청기간이 맞물렸다. 시험과 과제가 아무리 몰아친대도 어떻게든 이건 제출해야 했다. 더 이상의 독박육아를 버틸 수 없어 남편에게 SOS를 요청했고, 다음 학기는 남편이 회사에 육아휴직을 신청해 합류한다는 계획을 세웠기에 재정적으로 어려워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유학 첫 해에 난 이미 너무 많은 돈을 썼다. 남편이 한국에서 급여를 받아 송금해주지 않았다면 4년간 준비한 유학자금의 상당 부분이 날아갈 뻔했다. 남편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육아를 함께하려면 어떻게든 재정지원이 절실했다.
(우리 부부가 4년간 어떻게 유학자금을 준비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이 글을 읽어주세요)
대학원에 입학한 작년 9월부터 올해 5월까지 지난 9개월간 기록해온 지출내역을 결산해봤다. 5프랑까지는 동전을 쓰다 보니 소비 단위에 무뎌지게 될 것 같아 기록을 시작했다. 한화로 바꿔 따져보지 않으면 1프랑을 500원 쓰듯이 하게 될게 뻔했다. 엑셀 시트에 정리해온 덕분에 쉽게 계산할 수 있었다. 4만 프랑(한화로 4600만 원 정도)을 썼는데 그중 학비와 렌트, 보험료가 3만 프랑이었다.
남은 1년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으려면, 하나를 택해야 했다.
남편이 계속 한국에서 돈을 벌어 송금해준다. 즉, 아기를 내가 혼자 키우면서 지금처럼 울면서 공부해야 한다는 뜻. 이건 공부를 하는 것도 육아를 하는 것도 아니여. 패스.
4년간 모아 온 전세보증금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빈털터리가 되어 한국에 돌아간다. 우린 아직 집이 없으니 한국땅을 밟는 순간 억대 빚을 져야 한다. 별다른 묘수가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아기를 한국으로 보내고 혼자 공부한다. 어떻게 다시 만난 아기인데... 더 이상은 엄마를 모르고 자라게 하고 싶지 않다.
절박한 심정으로 레터를 썼다. 더 이상은 나 혼자 버틸 수 없으니 우리 세 식구 함께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내가 여성이고, 아기의 엄마라는 이유로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써놓고 보니 좀 구걸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마감기한 임박으로 고치고 다듬을 시간도 없이 제출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받은 결과는 부분 장학금(partial scholarship). 연 8000 프랑 내야 하는 학비는 1000프랑으로 감면, (한 학기 학비가 58만 원!) 그리고 연 9000프랑을 생활비로 지원해 주는 조건이었다. 한화로 따지면 연 2천만 원 정도의 혜택을 받았다. 스위스의 물가를 생각하면 전액 장학금을 받아도 3인 가족이 살기에는 넉넉지 않지만 솔직히 학비감면만 받아도 감지덕지였다.
아이와 돈 때문에 공부를 놓아버리려는 순간, 장학금이 주어졌다. 독박육아와 학업에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기숙사 9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간이 늘어나던 때, 남편은 회사에서 1년 육아휴직을 받아냈다 (보수적인 사기업이라 사직서와 휴직계를 동시에 품고 다닌 끝에). 공부와 육아를 병행하는 건 죽도록 힘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배우자가 이곳에 없었기에, 그토록 자리가 안 난다는 공립 어린이집에서 신청 한 달만에 연락이 왔다. 스위스의 크레쉬는 소득 수준별로 내는 학비가 다르기 때문에 풀타임 학생으로 소득이 없는 나는 거의 최저 수준으로 지불하고, 아이는 집에서 도보 3분 거리의 기관에서 교사 대 학생 비율이 1대 4 정도의 밀착 보육을 받는다. 젊은 여자 선생님만 있는 게 아니라 아이가 잘 따르는 남자 선생님과 할머니 선생님이 있다는 점도 좋다.
이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내 인생에 쌓여갈수록 이 길 끝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기대하게 된다. 나는 겨우겨우 버티는 것 말고는 잘한 게 없는데, 길이 열리는 이유가 뭘까. 지금 내가 하는 공부는 나중에 어떻게 써먹게 될까. 아님, 써먹지 못하게 되더라도 세상에 작은 변화는 일으킬 수 있을까. 12년 전 프랑스에서 나를 지켜보셨던 목사님을 최근 뵀는데, 20대 초반의 내 꿈을 기억하고 계셨다.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획은 내가 있던 프랑스에도, 이집트에도, 한국에도, 스위스에도 아직 긋질 못했다. 앞으로 어디에 어떻게 그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그 꿈, 그 기도는 유효한 것 같다.
12년 전과 똑같이 나는 여전히 프랑스어가 좋고, 아랍 사람들을 만나면 왠지 반가우면서도 짠하다.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여성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같은 여성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을 보면 내 아기의 얼굴이 스친다. 비록 현실은 밥 먹다 밥풀 집어던지는 아이 때문에 열 받고, 기대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내 실력에 좌절의 연속이지만, 이런 하루하루라도 내 안의 열정과 방향을 잃지만 않으면, 이 길 끝에 분명 뭔가 놀라운 것이 짠 하고 나타날 거란 기대로 오늘을 기록한다.
응급실 한번 간 적 없이 지난 1년간 건강하게 자라준 내 아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