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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Jan 19. 2019

공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한국에서 전업주부 코스프레 일주일 만에 깨닫다



다 포기하고 한국 가고 싶다.


백일 된 아기를 한국에 떼어놓고 홀로 유학길에 올랐지만 수업을 10%도 알아듣지 못해 좌절할 때,

잘하고 싶은 욕심은 앞서는데 현실에선 말 한마디, 질문 하나 못하는 내가 싫을 때,

친정엄마가 귀국하시고 아기와 둘이 지내며 겨우 학교 다닐 때,

난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내게 주어진 '엄마'라는 이름과 기대가 너무 무거워 힘들 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처럼, 할머니처럼,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 뒷바라지하고 살림하는 삶은 어떨지 상상했다. 가사노동과 육아에도 분명 보람과 기쁨이 있지 않나. 여가 시간엔 내가 좋아하는 책 읽고 글 쓰고 그렇게 살면 행복하지 않을까.


한국에서 평범한 주부 코스프레를 일주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난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일주일간 머물렀던 동생네 신혼집은 방배동이었고 남편의 회사는 서대문이었다. 그는 붐비는 지하철이 싫다며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나와 아기가 한국에 있는 동안 야근을 할 수 없으니 일찍 가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한국 와서도 어김없이 새벽 6시에 일어나는 아기와 하루를 시작해 남편이 '가족맞이 특별 칼퇴'를 하고 오기를 기다렸다. 마감에 쫓기던 생활에서 벗어난 진정한 휴식기간이었다. 나의 하루는 대략 이랬다. 


6시. 기상. 아이 이유식과 간단한 아침 준비
7시. 신랑 출근하고 설거지 및 집안 정리, 아기와 놀이
10시. 수유 후 아기 1차 낮잠. 나도 잠.
11시. 점심 준비. 아기 먹이고 나도 식사
12시. 산책 (유모차로 동네 한 바퀴, 마트 장보기, 비 오면 1층 로비 맴돌기)
2시. 수유 후 아기 2차 낮잠 (책 읽고, 인터넷 하고, 지인들과 연락, 외출 준비 등)
4시. 친구들을 만나거나 병원, 보건소 방문 등 볼일
6시. 식사 준비, 아기 저녁 먹이기, 아기와 놀이
8시. 귀가한 남편과 저녁 식사
9시. 아기 목욕시키고 수유, 재우기
10시. 육아 퇴근 후 신랑과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티타임
11시. 취침


엄마, 나가고 싶어요. / 얘야, 여긴 자연을 누리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 곳이란다.



며칠은 재밌었다. 해야 할 일들의 압박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에 해방감을 느꼈고, 평소엔 요리를 즐기지 않는데도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간편식들과 각종 양념, 식재료로 요리하는 게 즐거웠다. 이마트 온라인으로 장보고 집으로 배송받았을 땐 환호성을 질렀다. 내 주방과 조리도구들이 있는 나의 공간에서 아이를 키운다면 이런 일상의 연속이겠지, 살짝 맛보기 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런 여유 있는 생활은 꿈일 뿐, 현실이 될 수 없었다. 지금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온다면 말이다.


첫째, 우린 집이 없다. 회사 반경 대중교통으로 50분 이내 3인 가구가 거주할 만한 전셋집을 구할 목돈도 없다. 남편의 통근거리와 시간은 더 길어졌지 줄어들 수는 없다. 출근시간은 더 빨라지고 퇴근은 더 늦어질 거다. 하루가 길어지는 만큼, 남편의 부재가 커지는 만큼, 아이는 엄마의 책임과 헌신을 더욱 필요로 할 것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둘째, 일하고 싶어도 현재 스펙으로는 갈 곳이 없다. 지거국 학부졸업에, 해외봉사 다녀왔고, 공공기관 경력, 사회학 석사 학위, 절판된 저서가 한 권 있으며, 영어와 불어가 가능하지만 미취학 아이가 있는 경단녀다. 반면 취업시장에는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자격요건을 갖췄으며 미혼에 아이 없는 구직자들이 넘쳐난다. 공채에 도전하기엔 나이가 많고, 전공살려 연구직으로 가기엔 전문성이 부족하다. 총체적 난국이다. 


셋째, 지금껏 쓴 돈이 너무 많다. 물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유럽 사람들도 이민 가고 싶어 한다는 스위스에서 살아봤고 잠깐이지만 아이도 스위스 공교육을 체험해봤고, 우리가 치른 기회비용보다 얻은 경험이 더 크긴 하다 (경제학 전공자인 남편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그러나 지금껏 쏟아부은 돈과 에너지, 눈물을 다른 데 투자했더라면 지금보다 한결 편안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을 거라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우리의 결정은 행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 끝을 봐야 했다. 





스위스에선 우리집 창문이 액자요.


몇주 전, 제네바에서 겪은 일이 떠올랐다. 

날씨가 좋아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의 호수공원에 유모차 산책을 나갔다. 놀이터에 내려서 아기와 그네도 타고, 모래놀이도 하고 돌아가는 길에 같은 기숙사에 사는 아담과 아담 아빠를 마주쳤다. 아담은 우리 아기보다 한 살 많은 두 돌 아가고, 팔레스타인에서 왔다. 아담 아빠는 UNCTAD (유엔무역개발회의)에 근무하며 우리 학교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고, 아담 엄마는 시리아 관련 NGO에서 인턴십을 마치고 구직활동을 하고 있었다. 퇴근한 아빠가 유치원에서 아담을 픽업해 공원으로 오는 길이고, 여기서 붕붕카 타고 놀다가 시간 맞춰 집에 들어갈 거라 했다. 아담 엄마는 기숙사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후 5시 즈음이었다. 아담 아빠가 칼퇴할 수 있고, 직장과 유치원, 집까지의 거리가 가까워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거야말로 완벽한 워라밸 아니겠어?


당시 감탄하며 바로 남편에게 보이스톡으로 전하자 그는 말했다. 

"그러려면 UN에서 일할 능력이 먼저 있어야..."



가족 중심의, 여가가 있는 생활.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한 연간 최소 4주의 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그 권리를 실제로 이행해도 아무도 눈치 주지 않는 노동 환경. 직업의 귀천이 없고, 마트 계산원도 월 500만 원을 벌 수 있으며, 주 5일 풀타임으로 일할지, 80%만 일하고 그만큼의 급여만 받아갈지 라이프사이클에 맞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회. 엄마가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육을 책임져주고,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이 보장되어 있는 복지 국가. 


내가 살고 싶고, 내 아이가 살았으면 하는 곳이 여기였다. 유학을 한다고 해서 이곳에 원하는 일을 구해 정착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나로서는 공부가 소망을 이뤄줄 가장 확률 높은 선택지임은 분명했다. 아이에게는 우리보다 나은 환경을 선물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여보, 나 너무 좋은 걸 알아버려서, 다시 한국 와서 아등바등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내 아이가 아빠 얼굴을 새벽과 잠들기 전에만 볼 수 있는, 주말 없이 몸 바쳐 일해도 집 한 채 가질 수 있을지 불투명한 한국에서는 행복하기 어렵겠다는 걸 깨달은 그날 밤, 우린 식탁 앞에 앉아 차를 마시며 탈조선의 의지를 굳게 다졌다. 우리의 가능성을 믿고 모험을 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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