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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Mar 09. 2019

국제기구에서의 첫 발표를 마쳤다

아기와 함께한 스위스 유학 지난 1년 반의 소회


(작가의 한 마디)
원래 계획한 연재 순서대로라면 여름방학에 아이와 한국에 다녀와 세 번째 학기를 시작하는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지금 꼭 쓰고 싶은 글이 있어서요 ;D



"같은 팀에 합류하게 된 거 축하해! 우리가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어!"


학교에서 국제기구와 진행하는 연구프로젝트인 캡스톤 프로젝트에 같은 팀으로 배정된 올가의 이메일이었다. 작년 3월 중순부터 올해 초까지 장장 10개월이 넘도록 이어진 프로젝트가 파트너 국제기구에서의 발표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끝났다.

난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그날 저녁부터 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출산 후 백일, 한국에 아기를 두고와 스위스에서 홀로 첫 학기를 보내고, 

친정엄마와 아기와 함께 스위스에서 두 번째 학기를 보내고,

두 달간 울면서 독박육아와 유학생활 병행도 해보고,

육아휴직하고 제네바에 합류한 남편, 주 3일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기와 세 번째 학기를 보냈다.

이제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있고, 한국을 떠날 때 백일이었던 아기는 벌써 22개월이 되어 뛰어다닌다.


유학을 결심하면서부터 지금까지도 내 발목을 꽉 붙잡고 놔주질 않는 고질적인 골칫덩이는 영어였는데

이제는 한결 자유해졌다,라고 멋지게 고백하고 싶지만 여전히 나는 영어와 씨름하고 있다.


모국어로 양질의 논문과 정책보고서를 척척 읽어내는 기분은 어떨까,

인터넷에 펼쳐져 있는 방대한 양의 정보를 모국어로 쓱쓱 스캔하는 느낌은 어떨까,

내로라한 석학들이 교수진으로 있는 이곳에서 모국어로 수업 듣고 대화하면 공부가 훨씬 재밌지 않을까,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영어로 좀 더 편하게 말하고 쓸 수 있을까.

영어가 모국어인 영미권 친구들은 물론이고, 영어로 공교육을 받아 네이티브 스피커나 다름없는 홍콩, 싱가포르, 인도, 가나, 잠비아 친구들까지 부러워했다.


작년 3월부터 12월까지 9개월간 진행한 연구 프로젝트는 

그런 면에서 나의 콤플렉스를 바닥까지 파헤쳐 드러내 직면하게 한 시간이었다. 

못난 나를 부끄러워하고, 자책하고, 열등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했다. 

미팅 날짜가 잡히면 일주일 전부터 스트레스받으며 준비하고, 제발 이 순간을 피할 수 있는 납득할 만한 핑계가 생기길 바랐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었다. 십 년 전, 이집트에서 보낸 2년의 시간으로 난 알고 있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절대 안 된다는 걸. 어떻게든 버티면 시간은 지난다는 걸. 그리고 그 후에 얻게 될 자산은 더욱 빛날 거란 걸.



학교에서는 두 학기에 걸쳐 캡스톤 프로젝트라는 걸 한다. 국제기구가 주변에 잔뜩 널려있는(?) 학교의 지리적인 장점을 강조해 석사과정 학생들로 이루어진 팀을 국제기구와 연결해 실질적인 정책 연구를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개발학 중에서도 환경, 자원, 지속 가능한 발전 (Environment, Resources and Sustainability) 전공인데, 우리의 파트너는 환경과 개발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 번씩 들어본 기관들이었다. 유엔환경계획(UNEP), 옥스팜(Oxfam GB), 유엔식량계획(WFP), 생물다양성 협약 사무국(CBD Secretariat), 세계기상기구(WMO), 국제이주기구(IOM),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등의 국제기구와 그 외 국제 NGO들, 민간으로서는 세계적인 제약회사 머크(Merck)도 있었다.


기관 쪽에서 제시한 연구 주제와 설명을 듣고, 관심 있는 프로젝트를 1, 2, 3 지망까지 써서 제출했다. 내가 써낸 프로젝트는 WMO, IOM, CBD와 진행하는 기후변화와 젠더, 기후변화와 이주,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관련 주제였고, 결국 1 지망으로 지원한 WMO 프로젝트에 배정되었다. 


팀원은 나를 포함해 세 명이었다. 몰도바(몰디브 아님)에서 온 올가와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온 엠제이. 우리 셋 모두 환경과 사회, 젠더 이슈에 관심이 있어 모였다. 학기 중이라 수업과 과제로 바쁜 중에도 2주에 한 번씩 모여 팀 미팅을 하고, 조교와 만나 진행 경과를 설명하고, 파트너 기관 담당자와도 만나 연구 방향을 설정했다. 그리고 5월 말까지 중간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언어가 자유로운 둘과 달리 나는 말을 잘 못 했다. 파트너를 만나도 자기소개와 미리 준비해 간 질문 몇 개만 겨우 하고, 조교와의 미팅에서도 활발하게 질문하고 의견을 내는 둘과 달리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의 회의 결과와 연구방향을 더 화려한 언변으로 브리핑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둘이었으니까. 


어느 날 조교가 내게 "넌 왜 미팅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안 하는 거야?"라고 묻던 날, 집으로 돌아와 울었다. 그깟 영어, 얼굴에 철판 깔고 말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회의를 100% 이해하지 못했어도 흐름이 끊길까 봐 질문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5월 초에 친정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아이와 둘이 지내면서 학기를 마무리할 때는 정말 최악이었다. 믿고 맡길 만한 곳이 없어 수업도 빠지는 상황이라 팀 미팅은 무조건 아기 동반이었다. 다행히 올가와 엠제이는 나의 고충을 이해하고 포용해줬다.


우리가 팀 회의를 할 때 아기는 유모차에 앉아 간식을 먹었고, 카페테리아에서 이유식을 먹었다. 도서관 미팅룸 바닥을 기어 다녔고, 강의실을 아장아장 걸어 다녔으며, 책상 위에 올라가서 놀고, 기숙사 1층 커먼 룸의 당구공을 갖고 장난쳤다. 회의하다 낮잠시간이 되면 분유를 먹이거나 유모차에 태워 학교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왔다. 올가와 엠제이가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아기를 안고 얼렀고, 엠제이가 아기와 눈 맞추며 놀아주는 동안 올가와 나는 회의를 했다.


중간보고서를 겨우 제출하고 피드백을 받기 위해 교수님과 미팅을 할 때도 아기는 함께했다. 그땐 막 걷기 시작한 돌 무렵이었는데, 교수님 연구실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건드리다 넘어져 울음이 터졌을 때 엠제이가 아기를 안고 토닥토닥 달래는 걸 본 교수님은 깜짝 놀라셨다. 한창 낯가릴 때인 아기가 스스럼없이 다른 팀원에게 안긴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자주 만나 고민하고 상의했다는 뜻이었다. 아기는 그렇게 우리 팀 제4의 멤버로 인증되었고, 덩달아 우리의 팀워크도 인증됐다.


남편이 육아휴직 후 제네바에 합류하고 나서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잦은 미팅과 발표는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한 달에 한번 꼴로 같은 환경 트랙의 다른 팀들과 전체 모임을 갖고 진행경과를 보고해야 했다. 초안을 작성하고 PPT를 만든 다음, 나는 영어로 스크립트도 작성해 연습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넉넉히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특히나 발표시간이 10분, 20분으로 정해져 있는 경우에는 영어로 말하는 속도가 느린 나는 같은 시간에 전달할 수 있는 내용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한번은 내가 포기를 선언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번 발표를 준비할 여력이 없어. 그리고 10분 안에 이 모든 내용을 발표할 자신도 없고. 그냥 너희 둘이 발표하는 게 어때?"

우리 셋의 프로젝트이니 모두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게 맞다는 두 사람의 설득에 결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발표를 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그들은 내용이 완성되면 일단 내게 먼저 선택권을 줬다. 

"네가 발표하기 제일 편한 파트를 선택해. 나머지는 우리가 할게."

"모든 걸 전달해야 된다는 부담 갖지 마. 네가 놓치는 부분은 우리가 커버할 수 있으니까."



팀워크가 좋았던 우리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한 명이 주도적으로 연구 방향에 대한 주장을 강하게 하다 보니 다른 한 명이 크게 마음이 상했다.

"지금 이건 우리 프로젝트가 아니라 너의 개인 프로젝트로 가고 있잖아. 우리 의견은 반영하지도 않고 네 멋대로 하고!"

"뭐? 그런 말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가 틀린 말 한건 아니잖아!"


중간에서 중재를 해야 하는 내 마음도 조급해졌다. 

'마감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대로 틀어지면 안 되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적당히 양쪽 모두 달래 가며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도 어느정도는 동의해."

"네가 이런 의미로 말한 건 알겠는데, 내 생각엔 이 친구 말대로 이렇게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없는 눈치를 최대한 긁어 모아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12월 중순, 최종보고서를 제출하고 포스터를 만들고 (여기선 내 기여도가 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아이들이 MS워드와 그래픽 툴을 몹시 못 다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기도 참석한 자리에서 결과 발표도 했다. 파트너 기관 담당자도 만족스러워했고, 겨울방학이 끝난 2월 초, WMO 런치타임 포럼에 참석해 우리 연구 결과를 발표할 자리를 만들어줬다. 내 인생 처음으로, 국제기구에서 게스트로 초청돼 발표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보고서는 현재 peer review 중이고, 그게 끝나면 세계기상기구의 이름을 달고 출판될 예정이다. 


팀원이었던 올가는 WMO에 인턴십 자리를 얻어냈고, 우리는 이 과목에서 최고점을 받았다. 성적표 옆에 새겨진 랭킹 1이라는 숫자는 스위스에 와서 처음이었다 (물론 동점인 다른 팀도 있을 수 있지만). 다른 학생들에게는 호들갑 떨 정도의 사건이 아닐 수도 있지만, 성적 중하위권에 유학 첫 학기 첫 시험에서 낙제 위기까지 겪었던 내게는 놀라운 성취였다.






후배에게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이 왔다. 3월이 되어 이제 1학년 학생들도 캡스톤 프로젝트를 곧 시작하는데 Q&A 세션에서 교수님이 잘된 케이스로 우리 팀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파트너 기관도 만족해하고, 국제기구에서 발표도 하고, 인턴십 기회도 얻고, 각자의 석사학위 논문 주제도 프로젝트 연구의 연장선 상에 있고.


내가 연구에 뛰어나서는 절대 아니다. 좋은 팀원을 만나 팀워크가 좋았고 (우리를 더욱 단단하고 친밀하게 연결해준 히든 멤버인 아기까지), 연구 결과를 성과로 연결하는데 적극적인 파트너를 만났고, 중요하지만 연구가 많이 되어 있지 않은 신선한 주제를 만났다. 다른 팀들을 보면 기관 사정으로 프로젝트가 무산되어 중간에 다른 곳에 배정된 팀도 있고, 파트너가 너무 바빠서 중간에 잠수 탄 팀도 있고, 팀이 할 수 있는 방향과 파트너 기관에서 원하는 방향이 달라 갈등을 겪은 팀도, 팀원들끼리 안 맞아서 싸우고 프로젝트를 끝내는 데에만 의미를 두는 상태까지 간 팀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성취가 돋보였을 수 있다.



외국어를 잘하고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건 분명한 이점이다. 특히 국제관계나 정치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출중한 언어능력은 정보를 수집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는데 필수적인 도구다. 하지만 지난 9개월간의 경험으로 내가 깨달은 건, 실전에서는 명석한 두뇌와 화려한 언변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이다.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아시안이든, 우리는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나보다 부족한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고 돕고 싶어하며, 때로는 화가 나서 분노를 터트릴 때도 있지만, 뒤돌아서면 미안해하고 그래서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프로젝트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기본이고, 그건 결코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잘하고 싶지만 맘처럼 잘 되지 않아 답답해하는 나를 이해해주고 기꺼이 팀의 일원으로 업고 부축하며 여정을 완주한 좋은 친구들을 얻었다. 감사한 일이다.


육아와 공부를 병행한다는 특수한 상황으로 첫 해에 수업을 많이 듣지 못해, 마지막 논문학기에도 채워야 할 학점이 여전히 남아 있어 매일 학교에 가는 나와는 달리, 둘은 학교에 오지 않는다. 이제야 강의내용이 좀 이해되기 시작하고, 이제야 친구들과 좀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 이제야 유학생활이 좀 재밌어지기 시작하는데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니. 


지난 1년 반이 쏜살같이 지나갔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동안 이렇게 영어가 안 늘었다는 사실은 더 놀랍다. (이정도면 내 언어 습득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나의 비루한 영어로도 수업을 듣고 프로젝트를 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다. 앞으로 내 인생에 네이티브처럼 영어를 잘하는 날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글로벌 환경에서 외국인들과 영어로 함께 일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유학 일 년 반, 자신감이 아주 조금 생긴 것 같다. 혹시 2년 전의 나처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권하고 싶다. 일단 저질러 보라고. 도전해 보라고. 죽도록 힘들 수 있긴 한데, 그래도 이 악물고 한번 버텨보라고. 낯짝(?)이 두꺼워질 것이다. 멘탈에 맷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성장할 것이고, 이전에 맛보지 못한 달콤한 성취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될 거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이렇게 써놓고 분명 난 또 내일 아침이면 논문 어떻게 쓰지.. 인터뷰는 어떻게 해야 하나.. 토론 준비는 또 어쩌고...  전전긍긍하겠지만.


이번 학기는 수업을 들으며 논문을 쓴다. 학기 말 즈음엔 박사과정에 지원도 할 거다. 어떻게 하면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에 살 수 있을지, 이 땅에서 소외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들이 배제되지 않아야 하는 타당한 이유와 어떻게 하면 그 굴레에서 그들을 이끌어 함께 갈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가고 싶다. 올가와 엠제이가 육아의 책임언어 장벽이라는 이중고에 좌절하던 나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가자고 손 내밀었던 것처럼, 나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일으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노라 고백한 임희정 아나운서의 인터뷰에서 깊이 공감한 말이 있다.

'노동자의 글도 쓰여야 하는데 노동자는 노동하느라 바빠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여 흔적을 남겨주시니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삶의 무게가 버거워 자신의 정당한 권리조차 주장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 

언젠가는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싶어 개발학을 공부한다. 

언젠가는 그들의 펜이 되어 세상에 알리고 싶어 오늘 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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