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라이딩!
지난 2월, 브런치에도 글을 하나 올렸던 것처럼 화천DMZ랠리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신청을 하기 전에 오르막에 약한 내 비루한 자전거 실력으로 완주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았다. 하지만 올해가 이미 11회째로 나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회이기도 하고, 과거에 화천DMZ 대회에 참가해본 사람들의 후기들을 봐도 초보자도 즐겁게 타고 올 수 있는 대회라는 호평 일색이어서 과감하게 참가 신청을 했다. 접수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얘길 들었어서 알람을 맞춰놓고 시간 맞춰서 신청한 덕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접수령을 넘을 수 있었다.
대회에 대비해서 꾸준히 연습을 해야 했으나, 4월 말에 코리아 란도너스 천안 200 km(서) 브레베를 가까스로 완주한 이후로 여러 모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연습이 부족한 상태였다. 주말마다 자꾸 비가 오거나 가족들과 어디 가야 할 일이 생기거나 해서 -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보자면 내가 게을러서 - 자전거를 안 타고 넘어간 주가 수두룩했다. 특히 오르막 연습과 심폐지구력 훈련을 많이 하고 체중도 몇 킬로그램 줄였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별로 준비를 못해서 많이 불안했다. 한 선배님과 함께 브레베와 벗고개, 서후고개, 명달리에서 오르막에 좀 익숙해진 게 그나마 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이었다. 최근에는 주중에 사내 피트니스 센터에서 개인 훈련을 받고 있어서 매주 두 번 정도는 근육운동과 타바타 같은 순환운동을 하면서 근력과 체력을 키웠는데, 이거 아니었으면 제한시간 안에 완주 못 하고 회수차를 탔을지도 모르겠다.
대회 전 주 금요일 저녁에 택배를 받았다. 택배 상자 안에는 기념품으로 선택한 쌀 2 kg, 자전거와 웃옷 등판에 부착할 배번호, QR에 장착할 기록 측정용 RFID 태그, 화천사랑 상품권(8천 원), 대회 안내문, 후원사 안내 책자가 들어 있었다. 대회에 나간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하면서 제한시간에 못 들어올 것에 대한 공포가 슬슬 커지기 시작했다.
대회는 5월 20일, 일요일이었다. 마침 그 전날부터 날씨가 말도 못하게 좋았다. 공기도 맑고 햇살도 좋고 기온도 적당하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날씨였다. 일 년에 열 번도 보기 힘들 좋은 날씨였다. 대회 당일에는 구름이 껴서 조금 흐리긴 했으나 공기가 맑고 기온이 적당한 건 마찬가지라서, 오히려 뜨거운 햇살에 고생하지 않고 쾌적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하루 전에 화천에 내려가서 펜션 같은 데 잡아서 놀고 대회 갔다 와서 화천, 춘천 근처 관광 좀 하고 올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화천에서 마땅히 놀 만한 게 없는 것 같아 그냥 혼자 가기로 결정했다. 대회 전날에는 자전거, 펌프, 헬멧, 클릿 신발 같은 준비물을 차에 실어놓고, 거실 바닥에 입을 옷과 주머니에 넣을 BCAA 가루, 파워젤, 이부프로펜 알약(오르막 오를 때 허리 통증 완화), 마그네슘/포타슘 알약(쥐 예방), 물통 같은 걸 잊지 않도록 깔아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집합 시간이 8시이고, 집에서 화천까지 2시간 1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서 5시 반쯤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실제 깬 건 5시 10분쯤. 아내가 깨워주지 않았으면 늦었을 것 같다. 얼른 샤워를 하고, 아내가 준비해 준 오트밀 한 그릇을 먹고는 후다닥 챙겨서 출발했다. 가는 길에는 자전거를 싣고 가는 차들이 정말 많았다. 중간중간 휴게소에도 자전거 매단 차들이 그득그득했다. 춘천에서 화천으로 가는 국도에서는 꽤나 가파른 언덕길을 화천 DMZ 대회 배번을 달고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화천에 도착하니 대회 분위기가 후끈 올라온다. 경찰과 자원봉사자들이 곳곳에서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고, 차들은 줄줄이 주차장을 찾아 헤매고 있었고, 좀 떨어진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타고 대회장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웜업 하는 사람들로 들뜬 분위기였다. 개회식 시작 시간인 8시가 다 되어 도착해서 그런지 가까운 주차장은 다 만차였다. 다행히도 가까운 골프연습장 주차장에 빈자리가 있어서 주차도 하고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체중도 줄였다. 개회식장에 도착해서 같이 참가 신청한 재방이를 만나 후원사 부스 좀 구경하다가 랜드로버에서 꽤 괜찮은 선물을 주길래 개인정보를 넘기고는 달걀, 에너지 바, 파워에이드, 스프레이 파스 등등이 담긴 선물 꾸러미를 받았다. 아침에 먹고 온 오트밀이 벌써 소화가 다 됐는지 출출해져서 에너지 바 먹고, 선물 꾸러미는 잽싸게 다시 차에 갖다 두고 신청했던 D 그룹 대기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태어나서 자전거 타는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인 건 처음 본 것 같았다. 축구장 가득 자전거와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모습을 보니 신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옆에 있던 재방이가 거기 있는 자전거 값을 다 합치면 100억은 족히 될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꽤나 놀랍다. 개회식이 진행되는 동안 미리 카페인이 들어있는 에너지 젤도 먹고, BCAA 탄 물도 좀 마시고, 이부프로펜하고 마그네슘 알약도 먹고 나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경품 추첨도 있었는데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나 나는 꽝. 1등 경품이 400만 원이 넘는 위아위스 자전거 완차였는데, 어떤 고등학생이 타 간 모양이다. 조금 부럽더라...
A 그룹부터 순서대로 출발을 했다. 화천 공설운동장을 나와 그 옆 공도의 출발지점까지 천천히 이동한 다음, 출발 신호와 함께 신호탄이 올라가면서 출발한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일제히 클릿을 끼우면서 나는 따다닥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퍼레이드 구간을 천천히 이동하다가 1차 기록 시작 지점을 통과하면서부터 점점 빠르게 이동했다. A 그룹은 기록 시작 순간부터 엄청나게 빡세게 달린다고 하는데, 우린 D 그룹에서 출발해서 그런지 그렇게 힘들게 달리진 않았다. 그냥 적당히 속도 맞출 수 있는 사람들한테 묻어서 이동했다. 1차 보급 지점은 해산령 오르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 근처에 있었다. 종이컵에 물을 나눠주는 곳이라 간단하게 물을 한 잔 마시고는 재방이는 화장실에 들른다고 해서 어차피 오르막 올라가면 재방이가 훨씬 빠를 테니 먼저 올라간다고 하고는 출발했다. 일단 첫 번째 목표인 해산령 무정차 통과를 달성하기 위해 너무 빠르지 않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르막 구간이 총 7.3 km 정도이고 상승고도는 425m라서 길고 높은 언덕이긴 한데, 다행히도 중간중간 완만한 구간도 있어서 숨을 가다듬을 수 있고, 가장 가파른 곳도 10-12% 수준이라서 꾸역꾸역 올라갈 수는 있다.
이전 대회 후기에서 읽은 것처럼 해산령에서는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오르막에 엄청나게 약한 내 입장에서는 터널 앞 1차 계측 구간 종점을 지날 때 정차하지 않고 올랐다는 게 정말 뿌듯했다. (물론 화장실 들렀다 뒤늦게 쫓아온 재방이는 금방 나를 앞질러서 먼저 정상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길고 긴 터널을 지나 2차 보급소에서 초코파이 2개하고 500 mL 짜리 생수 한 통을 받았는데 꿀맛이더라. 원래 초코파이 안 좋아하는데 20여 년 전 훈련소에서 먹은 이후로 가장 맛있게 먹은 초코파이인 것 같다. 해산령 내리막은 사고 위험 때문에 기록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대신 1차 계측 구간 종점에서 2차 계측 구간 시작점까지 한 시간 안에 통과하지 않으면 탈락이다. 시원하게 내려가서 평화의 댐도 구경하고 하면서 가다 보면 3차 보급소(컵에 담긴 물만 준다)와 2차 계측 구간 시점이 나온다.
2차 계측 구간 앞에서 물 좀 마시고 잠깐 스트레칭을 하고는 DMZ 구간으로 들어섰다. 화천 DMZ 대회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구간인데, 군사지역이라 도로 상태가 안 좋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화물차가 많이 안 다녀서 그런지 지 도로 상태가 최상이었다. 주변 자연도 아름답긴 했으나 힘들게 자전거 타느라 느긋하게 즐기지 못한 게 아쉽다. 한동안 가다가 함묵령 본격 오르막 구간 앞에 있는 4차 보급소에서 이온음료를 두 컵 정도 마시고는 잠시 화장실을 찾는 재방이를 두고 먼저 출발. 어차피 또 금방 앞질러 갈 테니... 함묵령은 해산령보다 낮고 오르막 거리도 짧지만 중간에 경사도가 꽤 높은 구간이 있다. 그 구간에서는 힘들어서 한 1 km 정도는 자전거를 끌고 올라간 것 같다. 다행히도 그 구간에서는 나 말고도 자전거 끌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정신적으로는 별 타격이 없었다.
함묵령 정상에 있는 5차 보급소에서는 물과 바나나를 줬다. 잽싸게 바나나 먹고 스트레칭 좀 하고는 함묵령 내리막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피니시 지점까지는 거의 내리막 아니면 평지다. 신나게 달려 내려갔더니 21 km 거리를 약 35분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나는 오르막도 약하지만 내리막도 약하다. 정말 빠른 사람들은 시속 100도 넘겼던데 나는 혹시 사고 날까 봐 무서워서 통제된 좋은 길에서도 속도를 많이 내진 못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최고 시속이 59 밖에 안 되더라. 스트라바의 함묵령 내리막-피니시 지점까지 구간 기록을 봐도 나는 상위 71%에 불과하다. KOM 보유자는 그 구간을 평속 50.3으로 내려왔구나. 어마어마하다.
완주를 하고 나서 마지막 보급소에서 음료수를 하나 받아서 마시고 조금 있으니 핸드폰 문자로 기록이 날아왔다. 3시간 1분 2초 14. 원래 목표로 했던 네 시간 안에 들어오기에 성공해서 기쁘기도 한데, 이왕이면 3시간 1분보다는 2시간 59분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1위 기록을 보니 남자는 1시간 32분, 여자는 1시간 41분이다. 40대 중에 제일 빠른 사람이 전 연령대에서 3위인데, 이 분도 1시간 32분이다. 평속이 거의 내 두 배인 셈이다. 아마추어 대회인 점을 감안하면 (물론 전직 선수였다고 하더라도) 정말 대단한 기록이다.
다 끝나고 나서는 재방이랑 같이 주변 목욕탕을 찾아가서 개운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상품권을 어디서 쓸까 고민했는데, 목욕탕에서 상품권 받는지 물어보니 당연히 받는다면서 반가워하신다. 팔천 원 상품권으로 목욕비 내고 이천 원 거스름돈도 받았다.) 밥을 어디서 먹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춘천으로 가서 숯불닭갈비를 먹었다. 원래 삼대천왕에 나왔다는 원조숯불닭불고기집에서 먹으려고 했지만 줄이 너무 길어서 옆에 있는 다른 집에 가서 먹었는데, 거기도 충분히 맛있어서 만족스러웠다.
화천DMZ랠리는 내가 지금까지 자전거를 타 본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날씨가 일단 너무 좋았고, 행사 준비나 진행, 보급소 운영도 아주 훌륭했고, 통제된 도로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주 신나는 일이었다. 분명 내가 낸 참가비만으로는 대회 운영이 안 될 것 같고, 화천시 차원에서 엄청나게 공을 들이는 것 같다. 굼디바이크, 마라톤메일, 동부MTB 등에서 사진 촬영 자원봉사해주신 분들 덕에 마음에 드는 라이딩 사진도 여러 장 건졌다. 사진으로 보니 새삼 더 곰팅이가 자전거 타는 것 같아 보인다.
내년에는 체중은 줄이고 체력은 올려서 또 나가자!
어제 최종 경기 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다. (등수 등이 들어가 있는, 어찌 보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려주는 결과다)
기록 자체야 예전에 받은 것과 다르지 않지만, 내 연대순위와 연대/성별순위, 그리고 전체순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이터가 기록실에 남아있다는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화천DMZ 대회는 큰 이변이 없는 한 매년마다 축제에 가는 기분으로 가도 좋을 것이 분명할 만큼 훌륭하고 만족스러웠다. 대회 관계자 분들과 화천군민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