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안 Aug 31. 2022

두 개의 웅크림

<hopeful skull in dawn>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는다는 것을 그다지 숨기지 않는 편이지만 진단명에서만큼은 솔직하지 못합니다. 우울증도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둘러대기에는 무난한 편입니다. 그 진단명이 붙은 적도 있으니 딱히 거짓도 아닙니다. 우울증, 경계선성격장애, 공황장애 등의 여러가지 진단명을 지나 현재 내게 붙은 주요 진단명은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 즉 'PTSD'입니다. 저도 이것이 제 문제에 있어 가장 특징적이고 정확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솔직하지 못한 것은 이 진단명이 어떤 과거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불행은 무례하게도 단순 가십거리가 되기 십상인데다 자칫하면 낙인이 되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방식 또는 과거를 해석하는 양태에 따라 실존은 제각각이련만, 불행한 사건이라는 특이성은 그 사건에 대한 편견을 곧장 한 사람의 본질로 오해하도록 하는 데가 있습니다. 나라는 한 사람의 콤플렉스는 서로의 밀도있는 교류 속에서 이해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태도가 그리 호의적이지 못한 축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악의 가시들로 그득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선사한 불의 댓가, 판도라가 열어젖힌 제우스의 선물. 구차해진 신뢰, 기만당한 배려, 태만한 공감, 욕된 마음, 원한에 찬 목숨, 육덕해진 공간, 파리해진 긍정, 망각한 꿈과도 같은 것들. 그리고 헛헛해진 희망따위.


호의적이지 못한 것은 오히려 내가 아니라 삶이 아니었느냐고 반문해봅니다. 내가 경험한 세상의 원리가 작은 미덕이라도 보여주었다면, 아니 미덕까지는 버거우니 그저 가만히 나를 내버려 두었다면 이런 결말이 되었을까 하구요. 그저 불운은 마르면 그만인 소나기 정도면 적당하지 않느냐구요. 그저 행운은 몸을 말릴 정도의 볕만 있다면 적당하지 않느냐구요.


원망도 참 가없습니다. 이기지 못할 바에 차라리 잠을 즐깁니다. 세상에 나의 침대만큼 가장 안전한 네모도 없습니다. 눈꺼풀로 세상을 가리우고, 이불로 몸뚱아리를 가리우고, 수면호르몬으로 이성과 감각도 가리우고, 사라집니다. 시간의 뒤켠으로 밀려서서 현실은 시간과 함께 흘러나가도록 내버려 둔 채. 잔뜩 웅크리고 있습니다. 거슬러 거슬러 태어나기 이전의 자세로.




잔뜩 웅크리고 있습니다. 태어나기 위한 자세로. 포궁 벽에 얼굴을 묻은 나의 태아. 뛰는 심장과 혈류를 지닌 산 것. 그렇게 이미 살아있는 것이 내 안에 웅크려있습니다. 임신. 아이를 가졌습니다.


나는 아이가 들어앉은 배 위로 손을 얹고 있습니다. 간혹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그럴 때마다 손 끝에 약간 힘이 들어갑니다. 엄연한 존재가 주는 긴장감. 그것이 온전히 나로 인한 것이라는 중압감. 하지만 또한 기쁘게 여겨야 한다는 책임감.


살아있음을 권하는 일입니다. 살아서 세상을 겪으라고 떠밀어 내는 일입니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을 지금 내가 주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혼란한 모순입니다. 나조차도 살아있음을 확정하지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살아있음을 권하고 있다니.


흐릿하게 깨어 이 사태를 관망해 봅니다. 거꾸로 셈하듯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디에서부터였을까요. 무엇이었을까요. 어째서 이러한 모순을 만들고야 말았을까요. 그리고 저는 이것을 왜 그저 넘겨짚을 수 없을까요.

 

아이는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내리는 귀한 선물이라구요. 모두가 잘한 일이라 했고 모두가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나도 나의 삶에 드디어 행복이 찾아온 것이라며 다른 불행들은 차치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이것은 살아있음을 권하는 일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