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여자 (La Penseuse)
생각한다는 것
로댕의 잘 알려진 조각 '생각하는 사람'은 여성형과 남성형이 나뉜 불어 표기로 여성형 (La Penseuse)이 아니라 남성형 (Le Penseur)이다. 물론 서구 언어에서 남성형이 전체를 대표하기도 한다. 영어에서 Men이 인류를 표현하고 Him이 신을 표현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남성형 표기에 반해 생각하는 여자 (La Penseuse)란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여성이니 남성이니 하는 개념보다는, 그냥 다양한 세상에 관심이 많이 있다. 그런데 많은 이론들이 남성과 여성의 개념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도 그런 용어를 써서 나의 생각을 표현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아르누보 사조의 장식성이나 자연, 곡선을 여성으로 표현하는 것 등 말이다. 지금은 여성이나 남성이 특별히 다른 생각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화성인 같은 여자나 남자도 많고, 지구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한 성별을 가진 사람이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으로 동시에 태어나서 상대가 어떠했는지 경험을 하지 않는 한, 남성은 이렇게 생각하고 여성은 저렇게 사고한다는 이론은 그 자체로 모순이고 불가능한 낭설이라고 본다. 그냥 세상에는 지구 한 가득만큼의 다양한 성별과 그에 따른 생각의 모습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글의 형식에 대한 이론에 따르면, 남성적인 리얼리즘은 기승전결에 따른 명확한 선형적 구조를 가지고 써진 글이며, 이는 남자들의 주된 사고방식으로서 남자들은 무엇을 하는가에 중점을 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적인 리얼리즘에 따르면 여성들은 꼭 선형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으며 존재 자체에 중점을 둔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 둘이 상황에 따라 동시에 유용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자라서기보다 후자의 경우에 더 비중을 두는 소통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위의 이론에 나온 언어를 빌려 표현하자면(다시 말하지만,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하려는 건 나의 의도가 아니다), 나의 세상에 대한 관점은 현대사회를 결과, 이성, 물질, 자본에 집착하는 남성적 사고의 지배공간으로 보고, 이에 반해 나는 결과를 만드는 과정과, 과정을 지나는 매 순간, 오감을 넘어선 감각과 소통에 중점을 두어, 시간을 선형적 구조로 보지 않고 각기 다른 방향과 공간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할 예정이다) 내 안무도 그런 표현의 일환인데, 여자이건 남자이건 간에 내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런 소통의 전개와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은 내 작품에 적극 공감을 한다. 아니, 어쩌면 내가 친구와 늘 투덜거리듯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생각(사고) 자체를 하지 않는다’라는 게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라는 것은 국어사전적 표현으로 세 가지로 표현이 된다. (Daum 국어사전)
-경험해보지 못한 사물이나 일을 머릿속으로 그림
: 나에게 이런 생각이 존재하는 곳은 무의식적인 영역으로 생각 이전의 생각, 언어 이전의 언어, 기억 이전의 기억, 오감을 초월한 감각, 표상적이고 조각난 기억 (Verbatim Trace Memory) 등이 존재하는 곳이다.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 따위의 정신 작용
: 나는 의식적인 사고를 통해 무의식적인 사고의 결과물을 재조합하여 또 다른 허구들을 만들어 내는데, 이게 내 안무의 과정이다.
-어떤 것에 대한 의견이나 느낌
: 언어 분석적 사고가 아닌 오감과 감성에 의한 사고를 말한다.
‘생각’이라는 것이 국어사전에 저렇게 되어 있다면,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고 사람들이 많은 것도 어쩌면 맞을 것이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생각이 뭐냐고 물어보면 “오우, 그런 게 뭐예요? 골치 아파요, 나 먹고사는 거 바빠요!”라며 대화 자체를 거부할 가능성이 많다. “밥 먹을래요, 밥 먹었어요? 밥 사주시면 할래요. 언제 차 마실래요?”처럼 ‘생각’과 거리가 먼, 동물들도 다 하는 먹고사는 얘기를 꺼내면 조금은 눈을 반짝이며 발길을 돌릴지도 모른다. (나는 인사할 때 ‘밥’ 얘기 꺼내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같은 이유로 먹방이나 뭐 먹은 얘기를 사실 보고식으로 쓰는 것도 혐오한다. 내가 상대를 무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나는 저런 인사치레를 하는 편이다. “당신과는 깊은 대화 상대는 아니니 그냥 밥이나 먹고 꺼져줄래요?”라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을 하지 않으면 몸만 살아있는 ‘좀비’나 ‘노예’랑 똑같다. 생각은 ‘어려운 것’이거나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다른 것과 구별되게 만드는 인간의 특권이며, 이런 사고를 하지 못하면 “학습”이나 “예술감상”, “삶의 진전” 따위랑 거리가 먼 좀비 인류가 되어가고 있다고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다. 그 좀비들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용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사실 이들을 각성시키는 것보다 그대로 두고 이용해 먹기 좋게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우르르 가서 핸드폰을 사고, 찍어낸 제품과 서비스를 잔뜩 소비하게 하면서 나의 생각하는 삶을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사회에서 ‘제도화된 어떤 것’이고 '권력'이며, '교육현장에서 대중을 길러내는 방식'이다. 그런 삶도 나름 단순하니 나쁘지 않을 수 있지만, 과연 노예로 남고 싶은 인간이 있을까? 그렇다면 노예제도가 세상에서 점점 사라졌을 리가 없지 않을까?
자기 주도적인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각성을 하고 ‘생각’을 요하는 ‘공부’나 ‘예술’ 등을 한 번쯤은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 취향과 느낌(자기 의견이나 느낌, 예술과 문화의 향유)이 없고, 추상적 사고(상상하고 이미지화하는 법)나 분석적 사고 (헤아리고 판단함)가 귀찮고 힘들고 어렵다는 사람들은 바로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는 기준으로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생각이 없는지 마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을 해보길 바란다. 물론 당연히 생각이 없으면 그것조차도 안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많은 경우 무의식과 의식적인 생각이 일어나는 내면의 풍경을 무대 위 움직임으로 그려낸다. 내가 안무 작품에 중점을 두는 것은 몸을 통한 사유와 은유로서 시인이 시상을 종이 위에 글로 적으며 사유하듯이, 공간에 감수성 어린 움직임을 그려내어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내게 시와, 그림과, 무용과, 그 모든 것들의 본질은 다 똑같다. 또한 같은 이유로 장르와 범주구분으로 하나는 알고 다른 것은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한껏 ‘까칠해진’ 날에 글로 쓴 마음의 소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