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
누군가 내 스튜디오에 와서 말했어.
"오, 그림에 팔과 다리가 생겼어요! 그림이 더 밝아졌어요!"
그림은 자란다.
내가 그린 꽃과 나무들도 자란다.
그림은 살아있다.
그림은 점점 커지고, 누나, 동생, 친구들도 생기고 이웃들도 생겨난다.
그림은 내 땀과, 눈물과, 시간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그림들은 부끄러워서 아직 사람들 앞에 나오기 싫어한다.
Someone came into my studio and said,
“Oh, your paintings now have arms and legs! Your paintings look brighter!”
Yes, they grow.
My flowers grow, and my trees grow.
They are alive.
They grow bigger and give birth to siblings, friends, and neighbors.
They grow out of my sweat, tears, and time.
And they are shy; they don’t like to come out to the people y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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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어로 시를 쓰는 것이 더 좋다. 내 마음이 더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다. 내가 내가 되는 느낌이다. 이제야 시를 좀 쓰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내 시를 직접 번역해도 원문의 느낌을 다 가져올 수 없다. 애초에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차원이 또 다른 차원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 그나마 내 시는 내가 옮길 수 있어서 조금은 괜찮다. 그렇지만, 처음 썼던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는 부서지고 변형된다. 영어로 떠올린 시는 한글로 옮기면 이상해지고, 한글로 쓴 시는 영어로 쓰면 이상해진다. 언어는 보이는 형식이 다가 아닌, 느낌과 감정과 공간이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공기가 언어의 사이를 채운다.
영어가 완벽해서 그렇게 시를 쓰는 게 아니다. 언어는 세계이다. 그 언어를 사용하면 그 언어가 가진 세계에 사는 또 다른 존재가 된다. 나는 그 세계에서 사는 내가 더 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언어를 조합하고 부딪혀 그 사이의 느낌을 내는 나의 작법은 그 세계에서도 고유하다.
갑자기 슬픈 생각이 든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영어로 배우고 읽은 것들은 좋고 고급진 것만 있었고, 사랑이 가득하고, 훌륭하고, 똑똑하고, 나를 존중해 주는 사람들의 언어로 가득 차 있는 세계였다. 한글로 말하고, 들은 세계는 나를 존중하지 않고, 통제적이고, 거칠고, 세련되지 않고, 편향적이고, 별로 배울 것이 많이 없었다. 나는 영어를 하면서부터 공부가 좋아졌고, 더 똑똑해졌고, 자신감이 생겼고, 내가 그리 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글로 쓰는 글은 논리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답답함에 대한 것이 많고, 영어로 쓰는 글은 내 안에 소중히 숨겨둔, 때가 묻지 않은 아주 여리고 뽀얀 순수한 존재가 쓰는 것 같다. 혼자 있는 세계에 잠깐 그 존재를 내어 놓았다가, 세상 밖을 마주할 때 먼지라도 묻을까 얼른 가슴속에 그 뽀얗고 순수한 존재를 넣어 놓는다.
오늘은 추워서 집에 있었다. 추우면 나는 졸음이 오고 잠을 많이 오래 잔다. 가슴에 있던 그 뽀얀 존재가 오래간만에 나와서 짧게 시를 하나 던지고 갔다.
내 안에 꼼지락 거리는 그 존재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