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미 위성국에서 위성지도를 관찰하다 보니 위성지도상에 지렁이처럼 꼬물꼬물 쉴 새 없이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아무리 궁리해도 그 존재를 알아내기 힘들었다는 실체를 알고 보니 우리네 8사단 오뚜기 부대의 천리행군 모습이었다는 그렇게 기고 걷고 해서 노란 고름이 잔뜩 찬 모습에 빨간 피가 맺힌 모습이 8사단의 사단 마크가 되었다는 기가 막힌 위성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팔다리 다 닳아없어진 장병의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8사단 마크
이러한 위성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또 하나 있다.누구도 의심 할리 없었던 이야기, 바로 중국의 만리장성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봐도 그 위용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실상은 그 해상도를 아무리 높인 위성사진으로도 그 모습을 식별하기 힘들게 묻혀버린다. 만리장성의 위상만큼이나 미국이나 러시아에 빼앗긴 우주 정복에 대한 늦은 순위는 대륙의 자존심에 적잖은 스크래치를 낸 부분이다.
만리장성의 일부. P라고 표시된 곳이 만리장성이 있는 곳
우주와 관련된 신화는 깨졌지만, 만리장성은 여전히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일 뿐 아니라 건축학적 완벽성을 갖춘 절대적인 걸작으로 대접받고 있다. 약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국경을 따라 구축된 만리장성의 공사에 동원된 인구 이동으로 중국은 확산되었다. 또한 만리장성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외부 문화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역할도 해냈다.
중국인들이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방어용 성벽을 유럽인은 ‘중국의 성벽(Wall of China)’ 혹은 ‘대성 벽(Great Wall)’이라고 부른다. 이 엄청난 성벽 구축의 역사는 기원전 220년 통일된 진나라를 건국한 진시황은 기원전 3세기 혹은 그 이전 시대에 구축된 몇몇 성벽을 연결시켜 재건하였다. 이는 내몽골의 오르도스(Ordos)에서부터 만주까지 성벽을 증축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원전 206년 한나라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최초의 통합 방어체계로서 성벽을 서쪽으로 확장하여 그의 나라, 그의 세계를 곤고히하였다. 중국 중심부에 보존된 유적들에 따르면특히 황하강 유역의 계곡 지대와 란저우에 여전히 중요한 유적지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잘 남아 있다.
북경 근교에서 볼 수 있는 만리장성
만리장성의 폭과 높이는 자연 지형 및 군사적 중요도에 따라 각각 다르다. 사막이나 북방에 건설된 성벽은 그 폭이 1~2m에 불과하지만, 베이징 중심 지역에 근접한 지역의 성벽은 폭이 3~10m에 달한다. 높이의 경우 접근이 어려운 낭떠러지 같은 곳은 3~4m이며, 길목과 주요 요충지에서는 8m가 넘는 곳도 있다. 폭이 넓은 지역의 만리장성은 말과 마차가 이동하는 간선도로의 기능도 담당했다. 대표적인 곳이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80㎞ 지점에 위치한 바다링 부근의 성벽으로서, 이곳의 성벽 위에 만들어 놓은 길은 말 5 필과 마차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정도다. 또한 중앙이나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는 적군을 감시할 수 있는 망루와 누각을 비롯해 적군을 침입을 알리는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다.
만리장성은 그 이후 더 확대되었는데, 한무제는 중국 서쪽의 둔황 지역부터 동쪽의 보하이만까지 약 6,000㎞에 해당하는 성벽을 더 지었다. 중국 북방 경계지역에서는 몽골족·투르크족을 비롯해 초원 지대 최초의 제국인 흉노 제국의 퉁구스족 등의 침략 위험이 커짐에 따라 이전보다 더욱 견고한 방어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기 200년 한 왕조가 몰락하자 만리장성은 중세 시대에 접어들었다. 당시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방어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만리장성을 증축하거나 유지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몽골족의 멸망으로 오랜 갈등 기간을 끝낸 뒤 명나라는 진시황의 성벽 구축의 전통을 부활하여 5,650㎞에 이르는 성벽을 구축하였다.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만리장성은 수비대가 아닌 군이 관할하는 9개의 진체 제로 관리되었다.
요새는 마을, 산길, 여울을 방어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지었다. 성벽의 맨 위쪽 길은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하고 연락병의 이동도 가능하게 했다. 2개의 상징적인 기념물이 오늘날까지도 성벽의 양 끝에 서 있다. 동쪽 끝 산하이관이 첫 번째 성문이고, 1949년 이후에 완전하게 복구된 요새 자위관이 북서쪽 끝에 있는 마지막 성문이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북경 인근의 바다링 외에도 두 끝점인 산하이관과 자위관은 잘 보존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하이관, 그 끝은 바다와 만난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 자위관
명나라 시기의 만리장성은 거대한 공사를 수행하기 위한 엄청난 권력과 추진력은 물론 건축학적으로 완벽성을 지닌 걸작이다. 광대한 대륙의 경치와 어우러진 성벽은 완벽한 건축물의 예이다. 이러한 세계 유산으로써의 중요성 이외에도 성벽의 축조 과정 중에 백성의 고난이 극심했던지라 이로 인해 만리장성에 대한 이해는 중국 문학을 이해하는 필수 요소 이기도하다.
또한 숱하게 불어 박치는 북풍의 찬바람에도 장성이 오랜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고 견뎌온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단서는 지난 2005년 만리장성을 보수하던 근로자들이 우연히 벽돌에서 발견한 접착물질 속에 숨어 있었다. 당시 이 접착 물질을 분석한 중국 문화유적보존복원연구소는 찹쌀과 동일한 성분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10년 중국 저장대학 연구진이 거대한 만리장성이 오랜 세월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찹쌀로 만든 접착제 때문이라고 공표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석회가루와 찹쌀풀 반죽으로 만든 유무기 혼합 모르타르는 장성을 비롯한 고대 건물이나 무덤, 탑 등의 건축에도 사용됐으며, 이 같은 공법은 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에 견딜 수 있는 힘이 됐다. 실제로 1604년 명나라에서 강도 7 이상의 강진이 발생했을 때 이 공법으로 지은 건물이나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만리장성 중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부분은 전체의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국 장성 학회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완전히 허물어져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부분이 50% 이상이며, 파괴되기는 했으나 유적의 형태를 지닌 부분이 나머지 30%인 것으로 드러났다.
만리장성의 훼손은 오랜 세월 비바람 등의 침식작용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인위적인 훼손도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즉, 현지 주민들이 농경지나 도로 등을 건설하기 위해 성벽을 허물거나 만리장성의 벽돌을 가져다 집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2006년 만리장성 보호를 위한 조례를 제정해 규제를 강화해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 관리범위가 너무 길고 넓어 아직도 구조적으로 위태로운 곳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