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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seeker Jun 12. 2020

(1/2) 세계 8대 불가사의 진시황릉, 병마용의 시안

진시황릉과 병마용, Xian, CHINA

나의 버킷 리스트에 있었다. 많은 말이 필요할까? 그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이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진시황과 병마용 어떤 곳보다도 찾아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2019년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을 방문했었다. 충칭에 왔기에가 아니라, 비자를 발급받고 입국한 중국이어서가 아니라 그곳이 나의 버킷리스트에 있어서였다. 비행기를 좋아하지만 독일과 프랑스를 제친 우리나라의 고속열차 기술을 뛰어넘어 대륙의 넓은 땅을 시속 300km 이상으로 질주하는 고속열차 노선으로 빼곡히 채워 넣고 적대국에 가깝던 태국까지 계약 체결을 했다는 세계 최의 고속철도 나라가 되었다. 충칭에서 시안으로는 고속 라인을 가진 그들의 철도를 이용했다. 바깥 풍경으로 보이는 유채꽃밭에 늙은 노인이 끄는 달구지가 어색한 풍경을 나타내었던 중국 특유의 풍광을 지나 5시간여 만에 도착한 곳이 시안 북역(西安北驛)이었다.

 

고속철이 도착하는 시안북역


시안(西安)성(陕西省) 정부가 있는 성도(省都)이자, 중국 내륙 서부지역공업 중심지로서 면방직, 공, 자동차, 기계, 중화학공업, IT전자공업이 발달했다. 얼마 전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도 이곳 시안에 지어져 톨게이트 이름이 삼성인 지역 중심 거대 공업단지가 생겼다.


삼성 톨게이트 (左)와 삼성전자 반도체 시안사업장 (右)


또한 약 2,300여 년 동안 중국 최고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도시 전체가 명승고적이 가득한 관광 고도로 우리의 경주와 비슷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의 도읍지였던 시안은 당시에는 장안(长安)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 장안은 옛 중국을 대표하는 수도의 명칭으로 사용되는데, 우리가 외국의 수도를 수도라는 명칭과 더불어서 서울이라는 명칭을 써서 중국의 서울은 북경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수도 베이징 천안문 앞에 있는 큰길을 장안대로(长安大街)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장안은 11개 왕조를 거치며 오랜 기간 동안 륙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중심지였으며 당나라 때는 1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았다는 초대형 국제도시였다. 멀리 '로마', '아라비아'와의 무역이 빈번했던 실크로드의 시작점도 바로 이곳 시안이었다.

실크로드의 시작점


과거 당나라 옛 장안은 동서로 9, 남북으로 8㎞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장방형으로 잘 계획하여 건설된 성곽도시. 지금 시안의 옛 장안 구 시가지에는 명나라 때 새로 구축한 13km의 성곽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당나라 때 명승지들도 시내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최근 시안(西安)은 성곽 밖으로 북동쪽에 새로운 대규모의 신 시가지가 개발되어 현재 유동인구까지를 합치면 1,000만 이상 대도시가 되었. 중국의 서쪽 수도(西京)의 의미 시안(西安).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중앙집권체제의 황권을 확립했으며 당시 제후 봉건사회의 강력한 통치체계의 정치적 안정은 물론, 법률을 체계화하고, 농업기술 발전, 토지정책 개혁 실시를 통해 부강한 경제를 일으켰습니다. 한문 글자 보급, 화폐통합, 도량형 단위를 통일하고 북방 오랑캐를 막기 위한 장성을 축조하기에 이르렀. 그러나 통치에 반역이 되는 불필요한 책들을 불살라버린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악행도 저질렀.




진시황릉(秦始皇陵) 시안 북동쪽 30여 km 떨어진 린통취() 여산 국가공원 북쪽 기슭에 위치한 진시황제의 묘로써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의 거대한 능다.


진시황릉 (上), 진시황릉 묘비 (左),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록 기념비 (右)


시황제 즉위 초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여 중국 천하를 통일한 이후까지 70여만 명이 동원되어  30여 년의 기간을 통해 완성시켰다고 한다. 능 내부에는 초기부터 도굴을 염려하여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꾸미는 등 하늘과 땅을 모방한 내부 설계와 당시의 놀라운 토목기술을 통하여 동서남북 사방으로 공간을 나누고 겹겹이 외부와의 차단 벽면 설치와 세밀한 건축공법으로 습도 조절이 가능한 거대한 장방형의 지하 비밀 궁전을 축조했다고 하니 그 신비감은 이루 말할 수가  . 그러나 실제 IT 내부 공간 투시 데이터 축적 및 초음파 기술의 발달로 거대하고 신비스러운 능 안쪽 시설 규모 거의 판별이 가능하다는 식이 들리고 있다.


진시황릉 상상도 @네이버


능 주변 발굴작업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본 능 안쪽 내부는 고고학 과학의 융합기술이 더 발전하기까지 유물 발굴사업을 미루고 있다. 그래도 진시황릉 내부는 깜짝 놀랄만한 유물이 가득하다는 기대감, 능 내부의 신비감이나 규모에 있어서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 8대 불가사의한 곳 중에 하나로 손꼽. 1987년 진시황릉은 병마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 아직 내부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아 구릉을 넘기 위해 계단을 오르며 정원을 산책하는 정도이지만 그 발아래 무덤이라고 하기보단 거대한 지하도시를 상상하며 아직은 아쉬움을 달래수밖에 없다. 진시황제는 부귀영화와 불로장생을 꿈꿔보았지만 49세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다. 인생무상 얼마나 아쉬을까?  아쉬움을 이어줄 후생을 위한 진시황릉의 준비가  품고 있던 야심만큼  각종 추측 신비한 역사의 실체로 얼마나 더 많이 숨어있을지 궁금해하며 번 생에 꼭 다시 한번 방문하여 그때 그 진귀한 것들을 다 만나보리라 꿈꿔본다.




다음으로는 시안 여행의 메인 이벤트인 세계 불가사의 병마용()다. 병마용갱 (兵马俑坑)은 병사, , 전차 등을 실제 크기만큼 정교하았던 왕의 호위병사 군대를  인형으로 만들어  묻어 무지하게 흙구덩이이다.  세 개의 갱으로 나뉘고 1, 2, 그리고 3 호갱은 각각 군대에서의 주어진 역할이 명확히 나뉘어 각 호마다 보여주는 모습 역시 군대 조직과 문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생을 원하고 내세를 믿었던 황제, 진시황의 무덤이지만 영역인 진시황릉을 지키는 황제의 군대인 병마용 1974년 진시황릉에서  1.2km쯤 떨어진 시골 마을의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정말 우연히 병마용 유물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 실체는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남을 엄청난 발견이었다. 시안 시내에서 병마용까지는 대략 1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다. 가는 방법은 서안역 (서안 북역과는 다르다)으로 가면 광장 앞으로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화정지를 지나 병마용까지 가는 306번 버스를 탈 수 있다. 7위안 이면 충분한 버스비이다.


거대한 대륙의 한족답게 그 규모는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로 크다 그래서 병마용갱의 규모뿐 아니라 입구부터 매표소까지도 너무 멀다. 입장권을 끊고 어가 먼저 박물관진시황제와 대면하고 나면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버킷리스트의 실천, 2,000여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거대한 진사황제 석상(上), 병마용갱 입구(左)와 박물관(右)




당시 진시황제의 강력한 군주의 위력을 실감하게 하며 온갖 권세와 군대의 어마어마했던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마용을 구경할 땐 2 호갱, 3 호갱, 1 호갱 순서로 구경할 것을 권한다.

병마용 2호갱 전경

2 호갱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무것도 없다. 그냥 흙속에 파묻힌 그대로의 상태이다. 아직 복원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심지어 갱도 지붕 모습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부분적으로는 항우군의 방화 흔적도 남아있다. 병마용갱의 바닥에는 검은 벽돌을 깔았고, 격리 토담의 가장자리에는 일정 간격으로 나무 기둥을 세웠고 다시 기둥 위에 서까래 모양의 각목을 평행하게 설치하고 이를 토대로 천정목을 연결한 뒤 그 위에 다시 횡목을 덧대고 황토를 덮었다. 이 많은 것들을 파내고 섬세하게 다뤄야 하니 복원을 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병마용 2호갱의 아직 흙속에 파묻혀 있는 모습

병마용 2 호갱은 황제 호위병 중 좌군의 부대에 해당한다 무기나 전차, 말, 장군, 궁술 무사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아직 발굴이 더뎌 아쉬움을 달래라고 였을까?

2 호갱에는 주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궤사용이다. (아래 上左) 무릎을 꿇고 활을 쏘는 병사라는 뜻이다. 이 궤사용이 유명한 이유는 유일하게 전혀 파괴되지 않고 완전한 상태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무릎을 꿇고 있다 보니 전체적인 높이가 낮았고 지붕이 무너지면서 생긴 빈 공간에 우연히도 잘 자리 잡았던 탓이라고 한다. 머리카락을 땋아서 장식한 모습까지 세밀하게 표현했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궤사용의 뒤편에서 본 광경 때문이었다. 신발 바닥에 동그라미의 반복적인 패턴을 삽입했는데 이렇게 세심하게 조각했다니 병마용 하나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갔을까? 이런 병마용을 1만 개 이상 만들었고 아직 발굴하지 않는 4 호갱, 5 호갱까지 합하면 그 수는 어마어마하다. 리고 중급 군간부용 (아래 上右)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궤사용, 중급 군간부용, 장군용, 그리고 병마용

장군용 (위 下右)으로 불리기도 하는 고급 군간부용은 일반 병사의 평평한 신발 코와는 달리 중급, 고급으로 갈수록 그 높이가 높아진다. 마지막으로 병마용과 병마용을 이끄는 군용인데 병마용은 머리, 몸, 팔과 다리를 따로 만들어 결합한 뒤 색을 칠하고 1000도 안팎의 고온으로 구워내는 과정을 거쳤다. 속이 비어 있는데 고온으로 굽는 과정에서 내부 공기가 팽창해 도용이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렇게 미리 몸통에 구멍을 냈.




병마용 3 호갱의 규모도 2 호갱처럼 1 호갱과 비교하면 매우 작다. 3 호갱은 주로 장수들이 지휘하는 군 지휘소로 장군들과 청동 갑옷, 무기가 있고 청동마차, 말들이 보인다. 1976년 발견되었는데 아직 발굴 진행 중인 곳이다. 나무로 제작된 마차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마차가 놓였던 자리는 네모로 남고 마차를 끌던 마용들과 병사용들의 모습도 보인다.


3호갱에는 병사용 60여점과 마용 4점이 출토된 군사 지휘부로 추정된다.
장군용으로 추정되는 사마고차를 다루는 병사용들이 보인다. 그런데 장군용은 보이지 않는다.


병마용 1호갱 전경. 사진으론 언뜻 그 규모를 이해하기 힘들지만 빨간 머플러를 두른게 실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어떤가?

병마용 최고는 1 호갱이다. 들어가는 순간 책으로 보아왔던 광경을 직접 보고 있다는 감동과 그 압도적인 크기로 상상 이상의 규모와 거대함에 매우 놀랐다. 1 호갱의 규모가 가장 크고 그 길이가 230m, 넓이는 62m이며 깊이는 5m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 안에는 끝이 안 보이는 수많은 황제의 호위병사들이 대열을 맞춰 열 지어 서있는데 창과 병기를 든 주력부대이다. 1974년에 발견된 갱으로 크기만 큰 것이 아니라 보존 상태도 가장 좋은 편이다.

6000여점의 도용과 40여점의 전차가 있는 병마용 1호갱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6000여 점의 도용과 40여 점의 전차가 장방형의 전형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는 문헌상에 나오는 진나라 당시 1개 군진의 편성과 동일하다고 한다. 모두 11개의 갱도가 있는데 맨 가장자리 갱도에는 좌우 수비군이 4열 종대로 서있고, 가운데 9개의 갱도에는 역시 4열 종대의 중군이 배치되어 있다. 맨 앞에는 3열의 횡대의 선봉군과 뒤쪽에는 후위군이 배치되어 있다.

실제 제작되었을때의 병마용의 모습 (左) 여러 자연산 염료를 활용하여 채색되어진 병마용의 모습 (右) @Google

조각병마용은 흙속에서 처음 발굴되었을 땐 청, 황, 홍, 갈, 녹, 흑색 등으로 채색되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햇빛에 노출되면서 2~3일 만에 모두 탈색이 되어버려 현재의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더 나은 보존 기술이나 발굴 기술이 개발되지 않으면 남은 병마용들도 모두 그런 신세가 될 것이다. 그래서 추가 발굴을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병마용갱은 현재까지 3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이 4, 5 호갱의 존재가 들었음에도 아직 발굴을 하지 않고 있다.


제일 앞 3열 횡대의 선봉군으로 활과 노를 가진 궁수들

제일 앞에는 3열 횡대의 진열을 갖춘 궁수들이다. 투구를 쓰지도 않고 갑옷도 입지 않았다. 활과 노를 가지고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우선 장거리 타격을 하는 게 임무이다. 선봉군 뒤편의 일부 병사들도 차림새가 비슷한 병사들이 보인다.

도용의 크기는 대략 175cm 에서 196cm까지 이다. 도마용의 높이는 1.5m에서 2m로 실제 인물과 말보다 조금 크게 제작되었다. 이런 병마용의 정교함은 이미 2 호갱에서 실감한 것과 같은데 한 명 한 명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제작했기 때문에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고 하는데 정말 믿기 힘든 놀라운 이야기이다.


1호갱의 중군 병사들의 모습

중군 병사들은 무기로 창, 검, 장창 등 다양한 것들을 가지고 있고 일부는 전차병들도 있다. 무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은 초패왕 항우군이 병마용갱을 파괴하면서 무기를 거의 대부분 수거해갔다고 한다.


복원한 병마용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곳은 전시관만은 아니다 아직도 현장에서 발굴이 이어지고 있고 병마용 1 호갱의 가장 뒤편에는 복원된 병마용들이 진열되어 있다.




진시황이 병마용을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가설이 있다. 하나는 저승에 가서도 그곳을 정복하고 황제로 군림하기 위한 상징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적군의 침입에 대비한 호위군이라는 것이다. 병마용갱이 진시황릉의 동쪽에 있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전국 7옹중에서 진나라가 가장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적군이 쳐들어 온다면 동쪽에서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구글맵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아래 초록색 표기된 곳이 진시황릉이 있는 곳이고 그 오른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병마용갱이 있다.

항공에서 내려다 본 진시황릉, 구릉 전체가 릉이다.
초록색 마크가 있는 곳이 진시황릉이고 그 오른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병마용갱이 존재한다. @Google




소원성취 기쁨이 가득

버킷리스트를 지워나갈 때마다 느끼는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 않을까?

오랜 기간 학수고대하던 시안으로의 여행, 폭군으로 소문났으나 우리네 왕권들이 기반이나 능력이 약하여 제 목소리를 못 내고 불안에 떨어 지냈던 많은 선조들을 생각할 때, 춘추전국 시절의 어지러운 세상을 통일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생과 사 모든 영역에서 그 능력을 펼쳤던 진시황제의 추진력은 가히 멋지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상점이 있는 길었던 이동로가 이렇게 가볍고 짧게 느껴질 줄이야. 가면서 또 만나게 되는 장군용의 모습도 멋지게 또 하나 추억을 남기기에 충분히 만족스럽다.




시안까지 왔다면 당연히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직접 눈으로 발로 경험해야만 한다. 여운이 남는다면 우리네 국립박물관과 같은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박물관인  섬서성 역사박물관.

무려 37만 점의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구석기시대부터 청나라 때까지 중국의 화려한 문화가 숨 쉬는 다양하고 희귀한 문화재들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다시 만날 수 있는 병마용과 실크로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즐거움이 되는 곳이다. 그리고 도용을 만드는 도용이 있어 병마용갱의 어마 무시한 규모와 병마용들을 만들었던 70만 명이 10년이 걸려 만들었다는 그 노고를 눈으로 체험할 수 있다.


섬서성 국립박물관
병마용, 실크로드 무역상의 모습은 물론 도용을 만들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세계적인 고도 중의 고도인 시안.

시안을 소개하기 위해서 한 편의 여행기는 역시나 짧을 수밖에 없었다. 후속 편은 명나라 시대의 시안 성벽과 종루, 고루가 있는 성안 생활을 그려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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