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설날 아침, 성묘 간 집안 남자들을 기다리며 우리 집(시가)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하시던
(시) 작은 어머님은 잡채를 버무리다 말고 갑자기... 서럽게 우셨다.
"엄마 돌아가시니까 명절이라 해도 다닐 친정이 없어, 난 이제 고아야.
친정 엄마가 병환으로 돌아가신 다음 해 맞는 명절, 환갑이 넘은 작은어머니는 아이처럼 우셨다.
어른의 눈물(나도 어른이지만 ^ ^)은 왠지 더 서글프고 아프다.
어머님은 작은 어머님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친정이 왜 없어! 내가 친정이지! 자네도 나도 갈 친정 없으니 우리 서로 친정집 해주면 되겄네."
음식 솜씨 좋은 작은 어머님이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울음을 삼키며 버무린 잡채가 그 해 유난히 짰다, 고
여기엔 그렇게 쓰고 싶다(사실 작은 어머님이 하신 음식들은 모두 맛있다)
그래. 부모가 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부모가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출가(出嫁)해 다른 구성원의 내 가족을 이뤘지만,
내 부모가 있고 형제자매와 함께 지냈던 친정도 필요하다.
나에겐 유일한, 오빠가 친정이다.
몇 년 전 친정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뒤부터 명절이면 자연스럽게 오빠가 있는 곳이 '친정'이 되었다.
오빠와 나는 연년생이다. 정확하게 따지면 오빠가 태어난 12개월 3일 뒤에 내가 태어났다.
"네가 누나냐?"
오빠와 내가 나란히 서 있으면 사람들이 항상 이렇게 물어보곤 했다.
어릴 적 오빠는 또래뿐 아니라 나보다도 키가 한 뼘이나 작았다.
사춘기를 지날 즈음에서야 오빠는 내 머리 위로 한 뼘이 자라 있었다.
(어릴 적) 오빠는 나보다 작고 약했지만, 나와 다르게 어디서든 뛰어났고 빛이 났다.
개근상과 학업 우수상을 한 번도 놓친 적 없고,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S대에 합격을 하더니
4학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선 전공을 살려 바로 취업했다.
아버지의 공부 유전자는 오빠에게 몰빵이 되었는지 나는 학업 쪽으로는 젬뱅이 었다.
가끔 난 '착한 어린이상' '근면상' 등을 받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오빠보다 착한 것은 아녔다.
어릴 적부터 오빠의 별명은 무려 '양반'이었으니까.
여러모로 오빠는 나와 달랐지만, 둘 다 아버지의 눈꼬리와 얼굴형을 닮아 누가 봐도 남매임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같은 과 친구-지금은 베프인-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온 오빠가 말했다.
"TV 드라마에서 가족들이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고 거실에서 과일과 차를 마시면서 대화하는 모습이 정말로 현실에서도 있는 줄 몰랐다. 그런 삶도 있구나... 나도 그런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그랬다. 그리고, 항상 자신이 바라던 가정을 이루었다.
오빠는 오롯이 오빠의 노력만으로 지금의 가정을 꾸리고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오빠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그때의 오빠 말이 떠오르곤 한다.
나의 유일한, 친정, 오빠 기억이 닿을 때부터... 오빠와 난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력으로 대부분 불행했고
술기운이 빠지면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 사랑으로 때때로 행복했다.
그래서 오빠와 나는 서로를 아꼈고, 측은해했고, 사랑했다.
나는 갈 곳도 없으면서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그렇게 오빠보다 먼저 결혼을 했다. 그때 난 24살, 오빤 25살이었다. 고작..
내가 결혼을 한 뒤부터 혼자 집에 남은 오빠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몸과 마음이 병든 아버지를
그리고 그때와 다름없이 한 없이 부족한 여동생을 당연한 듯 짊어 메고 있다.
부창부수라고 새언니도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나를, 그리고 우리 가족을 챙긴다.
며칠 전부터 알아보고 예약했다던 편백나무찜 집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올해 유난히 비싸서 한 번에 3개씩만 먹는다는(^ ^) 딸기를 한 접시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새언니에게 톡이 왔다.
"아가씨~ 오빠 울어요. 또 아가씨 생각났나 봐요."
"으휴~ 그냥 냅둬요! 오빠 진짜 갱년기 오나 봐요, 왜 저래~ 진짜!!"
"아휴~ 내가 진짜 이 윤 씨 남매 때문에 못 살아 ㅠ 미워할 수가 없어."
내게 여전히 소년인, 지금은, 중년이 된 오빠가 눈과 볼이 붉어져 울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잠들어 텅 비어 쓸쓸한 골목을
텅 비어 고픈 위장 옆에 신문을 끼고 힘겹게 걸었을 오빠가.
잘 먹지 못해 빈혈 때문에 늘 휘청거렸던 오빠가.
고단하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오느라 힘들었던 오빠가.
고작 자기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 불쌍했다고 운다. 자기도 불쌍했으면서...
(내게 늘 많은 것을 해주고 있는 오빠다, 내 폰에 저장된 오빠 이름은 천사다 ^ ^) 오빠야, 울지 마.
오빠가 울면 내 마음엔 소나기가 내려.
누구의 도움 없이 오빠가 애쓰고 노력해서 지금 누리는 것들을 보면
오빠가 너무 자랑스러워.
그 전쟁 같았던 삶을 함께 견디고 생존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오빠가 이룬 오빠 가족처럼 여전히 나를 내 가족을 위하고 사랑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에게 '친정'이 되어줘서 고마워.
나는 오빠가 늘 자랑스러워. 오빠도 그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