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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글쟁이 Feb 13. 2024

친정, 오빠에게 간다.

전쟁 같은 삶을 함께 견딘 생존자이자 전우였던, 내 오빠

몇 년 전 설날 아침, 성묘 간 집안 남자들을 기다리며 우리 집(시가)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하시던

(시) 작은 어머님은 잡채를 버무리다 말고 갑자기... 서럽게 우셨다.


"엄마 돌아가시니까 명절이라 해도 다닐 친정이 없어, 난 이제 고아야.


친정 엄마가 병환으로 돌아가신 다음 해 맞는 명절, 환갑이 넘은 작은어머니는 아이처럼 우셨다.

어른의 눈물(나도 어른이지만 ^ ^)은 왠지 더 서글프고 아프다.

어머님은 작은 어머님의 등을 쓸어내리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친정이 왜 없어! 내가 친정이지! 자네도 나도 갈 친정 없으니 우리 서로 친정집 해주면 되겄네."


음식 솜씨 좋은 작은 어머님이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울음을 삼키며 버무린 잡채가 그 해 유난히 짰다, 고

여기엔 그렇게 쓰고 싶다(사실 작은 어머님이 하신 음식들은 모두 맛있다)


그래. 부모가 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부모가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출가(出嫁)해 다른 구성원의 내 가족을 이뤘지만,

내 부모가 있고 형제자매와 함께 지냈던 친정도 필요하다.

나에겐 유일한, 오빠가 친정이다.

몇 년 전 친정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뒤부터 명절이면 자연스럽게 오빠가 있는 곳이 '친정'이 되었다.

오빠와 나는 연년생이다. 정확하게 따지면 오빠가 태어난 12개월 3일 뒤에 내가 태어났다.


"네가 누나냐?"


오빠와 내가 나란히 서 있으면 사람들이 항상 이렇게 물어보곤 했다.

어릴 적 오빠는 또래뿐 아니라 나보다도 키가 한 뼘이나 작았다.

사춘기를 지날 즈음에서야 오빠는 내 머리 위로 한 뼘이 자라 있었다.

(어릴 적) 오빠는 나보다 작고 약했지만, 나와 다르게 어디서든 뛰어났고 빛이 났다.

개근상과 학업 우수상을 한 번도 놓친 적 없고,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S대에 합격을 하더니

4학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선 전공을 살려 바로 취업했다.

아버지의 공부 유전자는 오빠에게 몰빵이 되었는지 나는 학업 쪽으로는 젬뱅이 었다.

가끔 '착한 어린이상' '근면상' 등을 받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오빠보다 착한 것은 아녔다.

어릴 적부터 오빠의 별명은 무려 '양반'이었으니까.

여러모로 오빠는 나와 달랐지만, 둘 다 아버지의 눈꼬리와 얼굴형을 닮아 누가 봐도 남매임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같은 과 친구-지금은 베프인-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온 오빠가 말했다.


"TV 드라마에서 가족들이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고 거실에서 과일과 차를 마시면서 대화하는 모습이 정말로 현실에서도 있는 줄 몰랐다. 그런 삶도 있구나... 나도 그런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그랬다. 그리고, 항상 자신이 바라던 가정을 이루었다.

오빠는 오롯이 오빠의 노력만으로 지금의 가정을 꾸리고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오빠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그때의 오빠 말이 떠오르곤 한다.

나의 유일한, 친정, 오빠

기억이 닿을 때부터... 오빠와 난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력으로 대부분 불행했고

술기운이 빠지면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 사랑으로 때때로 행복했다.

그래서 오빠와 나는 서로를 아꼈고, 측은해했고, 사랑했다.


나는 갈 곳도 없으면서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그렇게 오빠보다 먼저 결혼을 했다. 그때 난 24살, 오빤 25살이었다. 고작..

내가 결혼을 한 뒤부터 혼자 집에 남은 오빠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몸과 마음이 병든 아버지를

그리고 그때와 다름없이 한 없이 부족한 여동생을 당연한 듯 짊어 메고 있다.

부창부수라고 새언니도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나를, 그리고 우리 가족을 챙긴다.


며칠 전부터 알아보고 예약했다던 편백나무찜 집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올해 유난히 비싸서 한 번에 3개씩만 먹는다는(^ ^) 딸기를 한 접시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새언니에게 톡이 왔다.


"아가씨~ 오빠 울어요. 또 아가씨 생각났나 봐요."

"으휴~ 그냥 냅둬요! 오빠 진짜 갱년기 오나 봐요, 왜 저래~ 진짜!!"

"아휴~ 내가 진짜 이 윤 씨 남매 때문에 못 살아 ㅠ 미워할 수가 없어."


내게 여전히 소년인, 지금은, 중년이 된 오빠가 눈과 볼이 붉어져 울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잠들어 텅 비어 쓸쓸한 골목을

텅 비어 고픈 위장 옆에 신문을 끼고 힘겹게 걸었을 오빠가.

잘 먹지 못해 빈혈 때문에 늘 휘청거렸던 오빠가.

고단하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오느라 힘들었던 오빠가.

고작 자기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 불쌍했다고 운다. 자기도 불쌍했으면서...

(내게 늘 많은 것을 해주고 있는 오빠다, 내 폰에 저장된 오빠 이름은 천사다 ^ ^)

오빠야, 울지 마.

오빠가 울면 내 마음엔 소나기가 내려.

누구의 도움 없이 오빠가 애쓰고 노력해서 지금 누리는 것들을 보면

오빠가 너무 자랑스러워.

그 전쟁 같았던 삶을 함께 견디고 생존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오빠가 이룬 오빠 가족처럼 여전히 나를 내 가족을 위하고 사랑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에게 '친정'이 되어줘서 고마워.

나는 오빠가 늘 자랑스러워. 오빠도 그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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