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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un 14. 2021

허리가 나 배신함 (2)

주사실과 물리치료실



바지를 내리고 엎드려 누워서 엉덩이를 보인 채로 주삿바늘을 기다리고 있으니 진땀이 났다.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갓난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의사의 손에 내 몸을 맡겨야 한다. 나는 어른이고 이건 내 몸인데,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게 묘하게 굴욕적이다.


"좀 따끔합니다."


꼬리뼈 부근으로 찌르는 듯한 뻐근함이 퍼졌다. 

내가 상상하던 무시무시하게 길고 두꺼운 주삿바늘은 아니었고, 꼬리뼈와 아랫 허리 부근에 대여섯 방의 주사를 놓는 치료법이었다. 내가 인터넷으로 봤던 무서운 허리 주사는 증상이 더 심한 환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일단은 다행이지만, 내 상태가 더 나빠지면 그 주사를 향해 쾌속질주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치료가 끝나고 주섬주섬 옷을 추스르면서 조금 슬퍼졌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될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어릴 때는 새로운 경험이란 신나고 기대되는 것들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식의 무서운 경험들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가늠하지 못하고 주인의 손에 들려 끌려가는  병아리처럼, 물리치료실로 안내받았다.


물리치료실엔 커튼이 드리워진 침상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고요한 가운데 낮고 반복적인 소리들이 들리는, 마사지실 같기도 하고 한의원 같기도 한 분위기다. 안내받은 침상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간호사가 와서 통증이 있는 부위까지 바지를 내리고 누워있으라고 했다. 또 바지를 내려야 하는구나. 아까 주사실에서 느꼈던 수치심은 벌써 휘발되고 없다. 아픈 허리가 나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바람직한 환자로 거듭나는 중이었고, 또 이번 치료에서 가장 클라이맥스였던 주사치료를 마치고 온 터라 마음이 관대해져 있었다. 전기기계 붙이고 누워있으면 되는 물리치료는 쉬워 보였다. 


이번엔 요통으로 연관통이 생긴 오른쪽 고관절 부위를 치료할 차례다. 벽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누워서 환부를 드러내고 있으니 간호사가 와서 환부에 차가운 젤을 바르며 수상한 기계를 가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체외충격파 받아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요. 없어요."


그런 건 처음 듣는다. 하지만 젤을 바르는 걸로 봐서 초음파와 비슷한 게 아닐까 추측했다.


"깊숙한 곳의 염증을 깨는 거라 좀 아프실 수 있어요. 염증이 많을수록 통증도 심하거든요. 아파도 좀 참으면 효과가 좋지만 너무 아프면 말해주세요. 강도를 줄일게요."


탁탁, 전기 튀기는 소리가 나면서 환부 쪽에 약한 아픔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참을만했다. 간호사는 기계의 접촉 부분을 천천히 굴리면서 환부 이곳저곳을 치료했는데, 제일 아프던 곳에 기계가 닿자 깊숙한 곳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기계는 분명 피부에 접촉해 있는데 고통은 안쪽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게 신기하긴 한데, 그런데 너무 아프다.


"아파요, 조금만 줄여주세요."


아파도 좀 참아서 일찍 나아야지! 다짐했던 나의 패기는 30초도 안 가서 무너졌다. 기계는 몸 깊숙한 곳에 내가 아파하는 곳을 집요하게 물어뜯는 것 같았고 나는 몸을 움찔거리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주먹을 꾹 쥐고 발끝을 오므렸다 펴면서 환부에 집중된 신경을 분산시키려고 애썼다.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생각은 물리치료실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금방 머리채 잡혀 돌아왔다. 너무 아파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다. 


으으... 으으으... 아픈 걸 티 내고 싶지 않았지만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그야말로 끙끙 앓았다. 다들 잘 참는데 나만 엄살 부리면 부끄러우니까 참아보려고 했지만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치료가 도대체 언제 끝날까. 영원 같은 시간... 기도 하듯이 두 손을 겹쳐 잡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빌었다.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나고 기계에서 들리던 탁탁, 튀기는 소리가 멈췄다.


"잘 참으시네요. 다들 아파하시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내가 정말 무시무시한 치료를 했구나 실감이 났다.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소리를 지르는 환자들도 있다고 한다. 체외충격파의 위엄은 그 정도다. 


치료를 마치고 너덜너덜해진 몸과 정신으로 엉거주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패배한 상이군인 같은 기분이었다. 무엇과 싸웠는지 모르지만 나는 철저하게 패배했고, 분명 치료하러 갔었는데 심신은 더욱 상해 있었다. 

허리에 맞은 주사와, 일자로 누워있는 척추가 찍힌 엑스레이 필름,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체외충격파...

오늘 아침 병원에 갈 때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연쇄적으로 벌어졌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심했다.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자책감. 

왜 나는 그동안 똑바로 앉지 않았을까. 왜 다리를 꼬았을까.

왜 운동을 무리하게 했을까. 

왜 좀 더 일찍 병원에 오지 않았을까.



우울하게 집에 가는 길.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몸이 한쪽으로 삐뚤어진 사람,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며 걷는 사람, 허리가 앞으로 심하게 굽어진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았나. 저 사람들은 저 불균형한 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건지 상상해보다가 또 울적해진다. 저들이 그걸 치료하기 위해 겪었을 아픔들과, 결국은 치료하지 못하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했던 체념까지 모두 내 것이 되어 마음이 무겁다. 


나는 이 재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인정하기도 쉽지 않고 체념하기도 싫다.

머리가 복잡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는 도수치료를 가야 한다.

도수치료는 또 새로운 세상일 테다. 벌써 병원에서 패배감을 느낀 나는 벌써 부정적이 되었다.

이번엔 얼마나 울적해질까 싶어서 점심 생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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