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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이 시작될 때

by Mook

전직 초등교사가 쓰는 퇴사기입니다. 흔히 교사는 사직, 퇴직 또는 의원면직이라고 하지만, 그만둔 게 단지 교직만은 아니기에 여러 직장에서의 퇴사기를 이어나가려 합니다. 순서는 들쭉날쭉. 재미는 없어요.




길지 않은 시간 교직에 있으면서 담임을 두 번 해봤다. 그중 두번째가 6학년 담임이었다. 익히 알려지다시피 6학년은 기피학년이다. 6학년은 아이들이 교사의 일상적인 말을 말로 듣지 않고 칼로 받아들이는 시기이다. 그러나 나름 6학년 매니아라고 불리는 분들도 있다. 교사 자신의 성격 덕이든 노하우든 결국 학생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 이게 잘 되면 교사의 말은 칼이 아닌 말이 된다. 6학년 담임이라도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다.


나의 경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성격, 실력, 경험, 노하우, 의지 모든 것이 내게는 부족했다. 아이들은 좋은 아이들이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일이 잘못되려면 모든 것이 틀어지기 마련이다. 그 해의 아이들은 나에게 참 나빴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아이들이 참 나쁘다고 느낀 때가 있었다.


4월의 어느날, 에버랜드로 현장학습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에버랜드에 도착하면 먼저 졸업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찍고 자유롭게 놀이기구를 타기로 했다. 하필 사진 촬영 장소가 입구의 반대편 끝쪽에 있었고, 아이들은 텅텅 비어있는 놀이기구 대기줄을 보며 뛰쳐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촬영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우리반 남학생 몇몇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진 촬영이고 뭐고 냅다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로 달려갔다. 덩달아 다른 아이들도 쫓아갔다. 사진 촬영은 망했다. 25명 중에 10명이 비었다. 남아 있는 아이들은 주로 여학생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사진은 찍지 못했다. 여학생들은 찍지도 못할 사진 때문에 자유시간을 한 시간 가까이 허비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이 아이들은 나의 모든 말을 칼로 받아들일 준비를 마치게 된 것이다.


하필 그날 휴대전화를 충전하지 못한 채 출근을 해서 에버랜드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된 상태였다. 사실 남학생 몇 명이 자유를 향해 탈주했을 때 전화를 했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그 아이들은 그저 사전에 정해진 일정을 깜박했을 뿐이다. 내가 알려주었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방전된 전화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오후 5시쯤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약속된 집합 장소로 여학생들이 먼저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탈주했던 남학생들이 제일 마지막에 왔다. 오전에 찍지 못한 사진을 찍어야 했기에 조금이라도 일찍 와주길 바랐지만 역시나 나의 방전된 전화기 때문에 미리 오라고 안내할 수 없었다. 우리 반 학생들이 모두 모였을 때쯤 다른 반 아이들은 이미 버스를 타기 위해 출발했고 늦게 모인 데다가 사진까지 다시 찍느라 더욱 늦어진 우리 반을 버스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터였다.


이와중에도 여학생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나의 모든 말을 칼로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그 아이들에게 나는 칼을 던졌다. 이제서야 나의 격앙된 눈빛을 읽은 남학생들은 사진을 모두 찍은 후 일사불란하게 버스를 향해 걸어갔지만, 여학생들은 이미 반쯤 망쳐버린 현장학습이라도 이대로 끝내기 아쉬웠을 것이다. 자꾸 줄을 벗어나서 한참을 떠들다가 뒤쫓아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때까지도 화를 참고 있었던 나는 그제서야 날카롭게 벼린 칼날을 던져댔다.


"저기 다른 반 아이들이 우리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자꾸 뒤에서 장난치면서 올거야?! 당장 안 뛰어와!"


드디어 균열이 시작되었다. 이 균열은 그 반의 붕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내 삶이 붕괴하게 된 원인이었다. 말을 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 칼을 던졌다. 그 사람은 이제 나를 영원히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날 이후 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고 기억한다. 그날 이후로 그 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를 날카롭게 찔러댔다. 그 해가 나의 교직생활 마지막 해였다.


교사를 그만두면서, 그 해의 아이들은 참 나빴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었다. 나쁜 것은 나였다. 그렇지만 나는 나쁘지 않은 교사가 될 자신이 없었다. 여기서 얻은 화를 저기서는 감출 요량이 없었다. 다름 아닌 나에게서 균열이 시작되었고, 그리 오래되지 않아 균열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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