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작년 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손 끝이 빨갛게 변한 정도로 추운 날 나는 이 추위를 모아 놓았다 더운 여름에 쓰자고 마음먹었다. 감각을 적금처럼 모아 놓을 수는 없지만 그런 생각이 나를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해 주었다.
바다에 가야지. 바다에 빠져 버려야지. 산호초 속으로 잠수한 다음 몸을 뒤집어 하늘을 봐야지. 내가 있었던 세상을.
내 기억 속 최초의 바다는 7살에 있다. 가족들과 같이 간 바다에서 나는 튜브에 둥둥 떠있는 것이 편안하다는 걸 깨달았다. 햇빛에 데워진 따뜻한 동해 바닷물과 내 몸에 꼭 맞는 튜브가 너무 편했던 탓인지 해류가 나를 먼바다로 데리고 가는 줄도 몰랐다. 나를 향해 소리치는 엄마의 목소리도, 빨간 팬티 수영복을 입은 아빠가 헤엄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아빠는 그날의 악몽을 꾼다. 몇 번인가 나에게 전화해서
'어젯밤 네가 바다에 빠져 죽는 꿈을 꿨다'는 이야기를 했다. 불쌍한 아빠.
나는 그날의 기억이 싫지만은 않다. 아빠가 알면 까무러칠 말이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로 편안했다. 바다가 무섭게 느껴졌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자연의 위대함을 모르는 인간의 오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오만한 감정보다는 편안함 때문에 바다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바닷속을.
스쿠버 다이빙 강습이 있던 첫날. 다이브 마스터는 우리에게 검은 쫄쫄이 옷(웻 슈트)과 오리발, 그리고 공기통(산소통이라고 말했다가 혼났다. '산소는 사람을 죽인다'면서)을 입히고서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꽤꽥 오리발을 싣고 힘겹게 자갈로 뒤덮인 해변을 걸어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내리막길이었다. 한껏 긴장한 모습으로 바다로 들어간 나는 해수면 아래에 정좌를 하고 앉아 있는 다이브 마스터를 봤다. 바닷 속이라는 사실만 빼고 보면 아주 편안한 자세였다. 우리를 향해 수신호를 하면서 그는 360도로 돌기도 하고, 물고기처럼 헤엄을 치기도 했다. 그건 자유의 모습이었다. 중력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자유가 그곳에 있었다. 공기통이 허락하는 30분 동안 나도 바닷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 숨소리가 고막에 진동으로 느껴졌다. 마치 우주에 있는 것 같았다.
휴가는 쉴 휴와 틈 가로 이루어진 한자말이다. 쉴 틈이 필요한 나는 곧 바다에 갈 거다. 나의 우주에서 고독하게 유영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