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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un 26. 2024

키르기스스탄 4

알라 아르차 국립공원

비슈케크 도착하고 두 밤 자고 났더니 월요일이다. 내일은 비슈케크를 떠나 카라콜이란 곳으로 이동할 생각이다. 비슈케크에서 누구나 하는 알라 아르차 국립공원 트레킹을 하려고 아침부터 서둘렀다. 어제는 오전에 빈둥거리다 정오가 지나 알메딘 협곡으로 트레킹을 떠났는데 오늘은 일찍 갔다가 일찍 돌아올 생각이다.


묵고 있는 호스텔 근처에 한국 프랜차이즈 '본죽'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라 아르차 국립공원 구글맵 리뷰에 본죽의 김밥을 트레킹 중에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고 인증사진까지 올린 것을 어제 보았다. 그래서 본죽을 찾아보니 바로 호스텔 부근이다.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나도 알라 아르차에서 김밥을 먹겠다고 다짐했다. 본죽이 문을 여는 8시에 맞춰 갔더니 마침 문을 열고 의자를 정리 중이다. 트레킹 떠나는 사람이 아침식사로 죽을 먹을 수는 없다. 아침식사는 서양식 조식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불고기 김밥을 포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밥은 빨리 상하니 호스텔로 돌아가서 채비를 다하고 다시 와서 김밥을 포장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한 시간 이상 더 신선한 김밥을 맛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호스텔을 나오는데 발이 이상하다. 아뿔싸 왼쪽 등산화 바닥이 입을 벌렸다. 뒤쪽 2/3 정도가 떨어져 덜렁거린다. 접착제의 주성분은 고무다. 고무는 시간이 경과하면 노화되어 딱딱해지고 금이 간다. 참고로 자동차 타이어의 수명은 6년이다. 멀쩡해 보여도 6년이 지난 타이어를 장착하고 더운 여름날 고속도로에서 과속하다가 영원히 갈 수 있다. 13년째 신고 있는 등산화의 접착제가 떨어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사실 이번 방랑을 떠나기 전 우려했다. 이렇게 될까 봐…


모든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 근심, 불안, 우려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한다.


키르기스스탄 오기 전 우도에서의 백패킹( https://brunch.co.kr/@jkyoon/701 ) 중에 우도봉을 오르며 등산화를 점검했다. 그리고 어제 알메딘 협곡 트레킹도 성공적으로 끝냈다. 당연히 오늘 아니 이번 방랑길은 버틸 거라고 생각했다. 부고가 갑자기 날아오듯이 등산화가 갑자기 숨이 넘어갔다. 이제 키르기스스탄의 일정이 시작인데... 등산화를 수선하든지 버리고 비슈케크에서 새로 장만하든지 해야 한다. 13년을 신은 등산화라 전혀 아깝지 않다. 남미, 네팔, 스위스, 이탈리아, 모로코, 튀르키에, 노르웨이, 캄챠카 등등 지난 13년의 함께한 추억이 줄줄이 스쳐 지나간다.


드디어 마침내 13년을 함께 한 분이 운명하셨습니다.


이렇게 외국에서 방랑 중에 문제에 봉착했을 때는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가장 가까운 현지인은 호스텔 리셉션니스트 타냐다. 그런데 아침 9시가 다되어 가는데 밤새워 근무한 타냐가 의자에서 자고 있다. 차마 깨우지 못하겠다. 일단 근처 신발가게를 구글맵으로 검색했다. 가장 가까운 신발가게로 덜렁거리는 등산화를 신은채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가다가 완전히 떨어져 버리면 큰일이기에 혹시 몰라 슬리퍼도 챙겼다. 신발가게가 막 문을 열어 점원이 빗자루로 바닥청소를 하고 있다. 진열된 신발을 훑어보니 운동화를 비롯한 캐주얼화뿐이지 등산화는 아예 없다. 운명이 다한 내 등산화는 에베레스트도 오를 수 있는 중등산화다.


어제 아침 방문했던 오쉬바자르가 생각났다. 그래 시장으로 가자. 뭐든 있겠지...


오쉬 바자르를 샅샅이 훑었다. 신발가게는 몇 있었지만 등산화를 파는 가게는 없다. 제법 큰 신발가게 앞에 주인인지 점원인지 모르는 아줌마가 앉아 있다. 등산복 차림의 배낭 멘 외국인이 다가가자 오히려 고개를 돌린다. 마주하기 싫다는 표현이다. 어쩌면 나를 보고 수줍어하는지도 모른다. 앉아 있는 아줌마 앞으로 가서 섰다. 드디어 아줌마가 올려다본다. 왼발을 들어 덜렁거리는 밑창을 보여주자 아줌마가 마침내 반응한다. 손으로 꿰매는 시늉을 한다. 맞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자 어디로 가라고 손짓을 한다. 복잡한 시장 안에서 어디로 가라는지 알 수가 있나? 구글맵을 들이대며 표시해 달라는 표정을 짓자 난처한 표정의 아줌마가 따라오라는 시늉을 한다. 아줌마를 따라 시장 골목을 이리저리 50미터 정도 걸으니 시장 밖으로 나와버렸다. 시장 밖 도로변에 수동 재봉틀을 앞에 놓고 수선을 기다리는 아저씨들이 여럿 있다.


송곳으로 고무 밑창에 구멍을 뚫어 손으로 신발을 빙 둘러 꼬매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라면 접착제로 붙일 텐데... 질긴 실로 그냥 꿰매어버린다. 왼쪽이 끝나자 아직은 멀쩡해 보이는 오른쪽을 내가 말없이 건넸다. 똑같은 방식으로 오른쪽도 끝났다. 이제 이 등산화는 방수가 아니다. 저렇게 많은 구멍을 뚫었으니... 500 솜 (8,000원) 달란다.


살다 보면 문제는 항상 예기치 않게 생긴다. 돈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많다. 돈은 8,000원 밖에 들지 않았지만 트레킹 나온 외국에서 등산화 밑창이 떨어졌다는 것은 큰 문제다. 만약 산에서 트레킹 중에 밑창이 완전히 떨어져 버리면 아주 난감할 뻔했다. 난 참 운이 좋다.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알라 아르차 국립공원으로 김밥 사들고 갔다. 결국 어제와 비슷한 정오에 출발했다. 알라 아르차 국립공원도 얀덱스 택시로 한 시간여 이동했다. 알라 아르차 국립공원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다. 사람에 대한 입장료가 아니고 차에 대한 것이다. 승용차가 700 솜이다. 공원 입구에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잘 포장된 도로가 11 킬로다. 택시를 타고 왔지만 등산로 입구까지 타고 가려면 700 솜을 내야 한다. 등산로 입구에서 택시비 1300 솜을 지불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알라 아르차 국립공원 경치도 마주 보이는 설산과 깊고 넓은 계곡이다.

텐샨, 히말라야, 알프스, 록키, 안데스, 코카서스, 아틀라스의 공통점은?

설산과 깊은 계곡을 갖고 있는 산군이다. 높은 산들은 항상 깊은 계곡들과 함께 한다.


등산로 입구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 여기저기 피크닉 테이블이 있다. 월요일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다. 한시가 지났으니 배가 고프다. 아침은 일찍 먹고 등산화 때문에 시장바닥을 헤매고 다녔으니... 트레킹 중간에 먹으려 했지만 계획을 변경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너무 맛있어 황홀했다. 불고기 김밥의 불고기 양념이 달고 진하다. 짜다는 얘기다. 국민학교 때 소풍 가는 날 엄마가 싸주던 김밥이 생각날 만큼 맛있어서 행복했다.


오늘 (끔찍했다가) 짜릿하게 행복했다.

오쉬바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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