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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Nov 03. 2024

Nagpatong Rock

새로운 경험은 예상 안 되는 리스크가 있다.

내게 새로운 경험은 책(글)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방랑을 하는 것이다. 새로운 경험은 내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그렇지만 새로운 방랑은 가끔 리스크를 안고 있다. 첫 경험이라 어떻게 전개될지를 모른다. 이런 불확실성이 리스크(Risk, 위험)다. 무사히 경험을 끝내면 무슨 리스크가 있었는지 확인된다.


남들도 많이 하는 경험은 리스크가 예상된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예측되는 것이다. 예상이나 예측되는 리스크는 대비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 로마 관광은 소매치기와 사기꾼이란 리스크가 있다. 이렇게 형태가 확실하면 대비할 수 있다. 여권이나 현금은 아예 소지하지 않고 그나마 있어야 하는 소액과 신용카드는 배에 찬 전대에 넣는다. 사기꾼은 친근하고 수려한 언변과 함께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부탁하지 않은 이유 없는 친절은 보통 사기꾼의 등장이다.


내가 자주 머무는 필리핀 숙소의 안주인은 32세의 필리핀 여인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아줌마다. 이번 방랑길에 안주인 Anne을 따라 트레킹을 하려고 등산화와 스틱을 갖고 왔다. 그런데 날씨가 안 좋다. 태풍이 필리핀을 지나가는 중이다. 원래 계획했던 산의 등산로가 진흙탕이란다. 다른 산을 찾아보고 있다고 한다.


페북에 홈페이지를 갖고 있는 'Outdoor Adventouristas'란 여행사 겸 산악회에 Anne이 예약을 했다. 우리 일행은 Anne의 친구와 한국 어르신 두 명이다.


자정에 앙헬레스에서 수십 킬로 떨어진 산 페르난도에서 15인승 미니버스가 출발한다. 한 시간을 달려 마닐라에서 세 번의 픽업과정을 거쳐 예약자 12명과 여행사 직원으로 미니버스가 꽉 찼다. 마닐라를 벗어나 산길을 한 시간여 달리더니 국도변 휴게소에 2시 반 도착했다. 아침식사를 하란다. 달걀 두 개와 Anne이 챙겨 온 컵라면을 먹었다. 난 거의 한숨도 못 잤는데 불안이 싹트기 시작한다.


점점 깊은 산속으로 미니버스는 신나게 달린다. 드디어 새벽 네시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입산 등록을 하고 이곳 현지가이드가 우리 일행의 안내를 시작할 거라고 한다. 공원사무소는 다섯 시 오픈이다. 한 시간을 기다리는 중에 화장실을 갔다. 아직 배에서 소식은 없으나 공원사무소 화장실을 보니 불안은 배가된다.


새벽 5시 아직 일출전이다. 손전등, 우비(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등산 스틱 차림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얼마나 가는지도 모른다. Anne과 영어로 대화하지만 그렇게 속 시원하지는 않다. 그리고 Anne이 밝고 쾌활한 아줌마는 아니다. 손전등 때문에 내가 양손을 사용할 수 없자, 스틱 하나를 Anne이 받아준다. 애매모호한 상황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나를 그래도 Anne이 나름 챙기고 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이슬비도 멎고 주변이 환해졌다. 드디어 큰 바위산 밑에 도착했다.


Welcome Nagpatong Rock 표지판 앞에서 우리 일행은 기념촬영을 한다.


표지판 뒤로는 50 m 정도 되는 엉성한 나무 사다리가 2단으로 하늘을 향해 놓여있다. 하루 만에 크게 자란 콩나무를 타고 올라 거인의 성에 도착하는 미키마우스가 생각났다. 오르는 것보다 내려올 것이 더 걱정된다. 여기서 포기해야 할까 하고 갈등하는 순간 사람들이 오르기 시작한다. 떠밀려 오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날카롭고 미끄러운 큰 바위 정상은  전체적으로 경사져 있다. 삐끗하면 바로 염라대왕 앞이다. 엉금엉금 네 발로 간신히 자리 잡았다. 아직 새벽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구름 속에 있는 듯 사방은 하얀 솜으로 꽉 차있다. 이제 한 명씩 절벽(사다리의 반대편) 위에 서서 사진을 찍힌다. 건너편 언덕 위에서 현지가이드가 사진을 찍고 있다. 한 명씩 그리고 12명 전체가 단체사진을 찍었다.


나는 고소공포증(Acrophobia, fear for heights)이 있다.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어르신은 고소공포증에 꼼짝 못 하고 있는데, 함께 등반한 필리핀 사람들은 무섭게 서 있는 바위 위에 서서 사진 찍고 찍히느라 엄청 바쁘다. 그들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공포다. 간신히 줄잡고 하산하여 정통 필리핀식 점심을 먹었다. 많이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허기만 채웠다. 식당의 화장실을 들렀다. 역시 전통적인 필리핀 스타일이다. 걱정스럽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아 근처 계곡으로 물놀이 간단다. 물놀이 후에 샤워가 가능하다고 한다. 계곡에서 필리핀 일행은 온몸을 적시며 물놀이를 한다. 사진을 찍고 찍히며 깔깔거린다. 나는 무지룩한 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다. 드디어 샤워장에 도착했다. 30페소(우리 돈 800원) 샤워장은 거의 날 것 그대로였다. 수도꼭지, 양동이와 플라스틱 바가지가 전부다. 그리고 필리핀 변기가 있다. 필리핀 변기는 어린이 변기 사이즈의 하얀 도기가 전부다. 엉덩이를 대는 판이 없다. 수세식이지만 자동이 아니고 완전 수동이다.


홀딱 벗고 땀에 쩐 몸에 바가지로 한두 번 끼얹자 드디어 신호가 온다. 변기에 엉덩이를 대지 못하고 엉거주춤 앉은 자세로 몇 덩이를 떨궜다. 그리고 양동이 물로 샤워를 마쳤다. 드디어 불안이 사라지고 완벽한 만족감과 편안함이 몰려온다. 이제는 계곡에서의 물놀이도 즐길 수 있고, 바위산도 아까보다는 훨씬 여유 있게 탈 수 있을 것 같다.


밤에 이동하고 일출 전에 산행을 시작하는 이런 등산 다시는 못할 것 같다. 일정 내내 화장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외국인에게 친절한 필리핀 사람들과 함께 한 등반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새로운 경험은 예상 안 되는 리스크가 있다.

정상의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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