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을 읽고
소설을 읽고 있나? 시를 읽고 있나? 소설과 시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장편서사시라고나 할까?
장편서사시는 비교적 긴 이야기의 줄거리를 갖고 있는데 반해, 희랍어 시간은 아주 짧은 줄거리만 있는 그러나 시적인 묘사가 많아도 너무 많아 장편으로 분류된 소설이다. 서사란 줄거리는 이해가 쉽다. 수많은 이야기가 세상에 차고 넘친다. 웬만한 이야기는, 비슷한 이야기는 들어봤다. 그러나 서정적 묘사는 이해가 어렵다. 공감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비슷한 감정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유전적으로 눈이 점점 멀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아니 말하기를 거부한 여자의 짧은 만남이다. 만남의 끝이 없다. 어느 순간 갑자기 소설이 끝나버렸다. 만남의 장면만이 머릿속에 그려질 뿐이다. 입맞춤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관심 있는 나 같은 세속적인(?) 독자는 짜증 날 수 있다. 소설(이야기)이라고 읽기 시작했는데 유명한 피카소나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보고 감동을 해야만 하는 기분이다.
"말했지, 도와달란 말 안 할 테니까, 내 앞길 막지만 말라고. 유학 갈 돈이야. 이 나이까지 석사도 못 마치고 뼈 빠지게 모은 돈이라고. 내가 그 돈 다 털어주건 말건 아버진 망할 거잖아. 망하고, 또 망하고, 끝까지 망할 거잖아." ‘희랍어 시간’ p. 107
희랍어 수업을 듣는 대학원생이 전화기에 대고 한 대사다. 이 대사가 왜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난 그런 아버지를 갖고 있지도 않았으면서 대학원생만큼이나 분노했다. 심지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식을 소유물로 간주한(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아버지들에 대해 화가 난 것이다.
도입부는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중반 이후는 비교적 쉬웠다. 다른 사람들의 독후감을 브런치에서 여러 편 찾아 읽었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의 지난 과거의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수시로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사진처럼 고정되거나, 시처럼 묘사된다. 기억은 현실이기도 하고 강렬한 꿈이기도 하다. 때론 상상되기도 하고 때론 어리둥절하기도…
내 어린 시절의 단편적 기억과 꾼 지 한참 지난 강렬한 꿈들이 환생하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한참 흐르면 내 기억인지, 이 소설 속 주인공의 기억인지 혼동될 수도 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잘 포장된 골목길을 두려운 마음을 품고 혼자 걸어가는 내 뒷모습이 보인다. 저 골목길의 끝이 어디인지, 목적지는 있기나 한 것인지, 왜 이 밤에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 가고 있는지, 무사히 골목길을 벗어나기는 할 것인지...
말하기를 거부한 주인공이 한강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한강 작가의 포니정 혁신상 수상소감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낮고 조용한 톤으로 천천히 말할 수 있을까 의아했다. 장애가 있어 말하는 과정이 아주 고통스러운 것은 아닐까? 말하기를 거부하는 과정 중이 아닐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말하기를 거부하고 글로만 세상과 소통하지 않을까?
수상소감문(포니정 혁신상)을 보면 이미 글로만 소통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저는 제가 쓰는 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사람이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써가면서 책 속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싶다"라고 했다. 오는 12월 10일 노벨상 수여식의 작가 한강의 수상소감이 기대된다.
설마 긴 침묵으로 대신하지는 않겠지!!!
https://youtu.be/6mUZDU2f-Jw?si=fA6KanX-3X453e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