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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Oct 23. 2024

한강

‘희랍어 시간’

일요일 저녁 인천공항이다.


공항에 오면 떠남에 따른 설렘이 있다. 이 설렘을 오래 음미하기 위해 공항에 일찍 그것도 아주 일찍 도착한다.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어르신 무료 전철을 타고... 그러나 오늘은 하나뿐인 조카 아들의 백일잔치 참석하느라 시간에 쫓겨 결국 택시를 탔다. 이런 상황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중국에서 만든 현대 소나타 택시는 이제 두 달 되었단다. 새것의 정갈함과 깨끗함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탑승동으로 건너갔다. 서점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급하게 짐을 싸고 집을 나서느라 책 한 권도 넣지 못했다. 방랑길에 책은 필요하다. 진열된 책을 둘러보는 중 소설가 한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서점가에 한강 작가의 책이 동났다던데, 마지막 남은 한 권의 책은 제목이 '한강' 같고, 저자가 '디 에센셜' 같은 표지 디자인이다. 일단 집어 들었다. 서점의 한강 작가의 마지막 책을 손에 넣었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장편소설, 단편소설, 시, 산문 등으로 구성된 책이다. 에센스만 모아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종이피아노'란 짧은 산문을 읽었다. 한강과의 첫 조우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살았던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어렵지 않았다. 격하게 공감되었다. 칠팔십 년대를 나도 살았으니까...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후 일체의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겠다는 작가가 훨씬 전에 결정된 포니정 혁신상의 수상소감을 말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조곤조곤 천천히 아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거의 바닥까지 내려간 톤으로 말했는지 읽었는지 하던 장면이...


술, 카페인, 여행을 이미 끊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묻는다고 했다. 작품 세 개를 머릿속에서 굴리며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다. 모든 중독을 끊었다. 커피도 중독성 습관이다. 여행도 중독성이 있다. 중독은 갈망을 불러온다. 해결되지 않은 갈망은 계속된다. 담배를 한동안 피우지 못하면 갈망이 생긴다. 자는 동안 계속 상승하는 갈망 때문에 아침에 눈 뜨자마자 문 첫 담배가 가장 맛있다. 비행시간에 비례하여 착륙 공항에서 무는 담배 맛도...


갈망이 채워지면 희열을 느낀다. 만족감과 행복감이 밀려오면서 마약 같은 환희를 맛볼 수 있다. 마약은 안 해봐서 모르지만 왜 사람들이 마약에 중독되는지는 담배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이런 희열이란 것이 단순한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중독에 초연해지기는 쉽지 않다.


능동적인 인생이란 자신의 시간을 자신이 제어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식으로 철저하게 계산하여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인생을 계획된 것에 쏟아붓는 것이다. 희망이란 지금의 어려움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계산하고 준비하며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럴 필요 있을까? 어르신이?

어르신이란 언제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는 존재 아닌가? 미래가 없는 존재 아닌가? 어떻게 어르신의 여생을 보내는가는 어르신의 선택 아닐까?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만 않는다면 철저히 자신의 자유를 만끽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강의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를 읽기 시작했다. 큰 기대와 설렘을 갖고 시작했으나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기 힘들다. 영미권의 대문호라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대학생 시절 억지로 읽던 때가 생각났다. 몇 페이지를 간신히 정독하고 나도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겠다. 책을 덮었다가 시간이 좀 흐른 후 다시 펴면, 전혀 그 앞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끝까지 읽었는지 아닌지도 기억이 없다. 내가 수준이 낮거나 교양이 없어서가 아니고 번역의 문제라고 치부했었다.


브런치스토리에서 희랍어 시간의 독후감을 찾아 읽었다. 점점 눈이 멀어가는 남자와 이혼하고 아이의 양육권을 뺏기고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강사와 학생으로 만나 풀어가는 이야기란다. 지금은 이미 죽은 언어인 헬라어, 희랍어,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배우면서 진행된다.


노벨상을 탄 대문호가 쓴 소설이지만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지는데, ‘희랍어 시간’은 결코 영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어느 감독도 깨닫지 못하고, 나 같은 관객은 영화의 플롯을 따라가지도 못할 것이다.


나이 들면 불면증이 오는 것이 정상이다. 생존의 불안이 불면증의 가면을 쓰고 찾아온다. 잠 못 드는 밤에 읽기 좋은 소설이다. 쉽게 잠들 테니… 아직 1/5 밖에 읽지 못했으니 남은 분량이 많아 다행이다. 이번 방랑이 끝나기 전에는 완독(?)하고 귀국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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