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간의 필리핀 방랑을 끝내고 새벽에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했다.
화장실에서 겨울 옷으로 갈아입었다. 30도가 넘는 필리핀에서 영하의 날씨로 순간 이동했다. 터미널 건물을 나서니 겨울 공기의 싸함이 코에서 느껴진다. 공항의 아침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막 떠오른 해가 주변을 훤하게 비추기 시작한다. 건물 사이로 드러난 하늘에 붉은 기운이 아직 남아 있다. 2 터미널 서쪽 끝은 아직 공사가 마무리 안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3층 출국장은 붐빌지 몰라도 1층 도착장 부근은 쌀쌀한 정적이 흐른다.
택시 타고 막히는 내부순환에 갖혀 있느니 공항철도를 타야겠다.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은 맑다. 천천히 공항철도 사인을 보며 걸었다. 급할 것 없다. 여생을 방랑으로 채우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서두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일반열차를 탔다. 두 시간 정도 후에나 집에 도착할 것이다.
공항철도 의자가 딱딱하다. 엉덩이가 아프다. 4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그렇지만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코노미 비행기좌석 쿠션은 거의 없다. 어르신 엉덩이도 지방과 근육이 빠져 쿠션이 없다. 그래서 딱딱한 의자에 오래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아프다.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이다. 2016년 남미여행을 떠날 때 구입했던 욕창방지 방석이 어디 있나 찾아보아야겠다. 이제는 동남아 갈 때도 챙겨야겠다.
서울역에서 지하철 4호선으로 환승했다. 출근시간이 막 지나선지 한산하다.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며 생각하니 아직 아침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 근처 맥도널드에서 맥모닝 세트를 먹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먹고 싶은 것이 바로 생각난다는 것은 아직 세상을 하직할 때가 아니란 방증이다.
지금 시간이 외손주 도민이가 유치원 등원할 시간이다. 딸 지민이가 유치원 등원시키고 나를 픽업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맥모닝을 먹으며 딸에게 어디냐고 물었다. '도민이 이제 등원하려고 씻기고 있는데. 도민이 데리고 아빠 먼저 픽업할게' 도민이 유치원이 우리 집 바로 앞이다.
맥도널드 뒤편 일방통행 길에 딸의 차가 도착했다.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앞자리에 앉았다.
할아버지: 도민아 오랜만이야. 할아버지 열흘 만에 귀국했는데 잘 있었어?
딸: 도민아 그냥 가자. 할아버지 탔으니까.
뒷좌석의 도민이를 돌아보며 딸이 말했다.
도민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딸: 왜 울어?
도민: (눈물을 흘리며 간신히) 모르겠어.
딸: 맥도널드에서 감자튀김 먹을 줄 알았는데, 엄마가 그냥 가자고 하니까 먹고 가자고 우기지는 못하겠고, 슬퍼서 우는 거야? 말을 하면 엄마가 들어줄 텐데...
딸은 도민이의 마음을 안다. 딸은 D에 있던 변속기를 P로 옮기면서,
딸: 엄마가 도민이 마음 알아. 엄마도 아직도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 못해. 도민아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가서 감자튀김 사 올게. 가면서 먹자.
할아버지: 도민아, 할아버지도 도민이 만할 때 억울하거나 분하면 말은 못 하고 눈물만 흘렸어. 도민이가 할아버지 닮았나 보다.
내 유전자의 반은 딸과 공유하고, 딸의 유전자 반을 도민이가 공유하고 있다. 많은 성격과 품성을 나는 딸과 도민이와 공유한다. ADHD 특성뿐 아니라 억울하거나 분할 때 말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것도 닮았다.
도민이를 보고 있노라면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