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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Dec 19. 2024

미망

광화문에서 대통령 탄핵 관련 집회가 매일 열리고 있다. 씨네큐브 광화문을 운전하고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 같다. 집 근처 아리랑 씨네센터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필리핀 열흘 방랑길에서 귀국했다. 잠깐 낮잠 잤더니 컨디션이 최상이다. 방랑길에 들고 갔다 끝내지 못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왠지 영화가 보고 싶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으로 봐야 몰입된다.


영화 검색 중에 '미망'이란 단어에 눈길이 간다. 미망인이 연상되면서 뭔가 깊은 의미가 있는 단어란 생각이 든다. 상영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2:15. 딱이다. 점심 먹고 아주 여유 있게 갈 수 있는 시간이다. 예매는 하지 않는다. 예매하는 순간 구속되는 것이다. 은퇴를 하고 시간에서 자유를 얻었는데 구속이라니.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못 봐도 그만이다. 영화 상영 전에 더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 못 봐도 그만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평을 검색하면 미리 줄거리 정도는 꾀고 갈 수 있지만 예고편 만을 보았다. 아주 천천히 아주 적당히 시간 맞춰 객석에 앉았다. 어두워지기 직전 상영관에는 남자 세 명, 여자 한 명이 드문드문 앉아 있다. 그나마 난 어르신 할인까지 받았는데...


迷妄  :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맴. 또는 그런 상태.

未忘  :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음.

彌望  : 멀리 넓게 바라봄. 또는 멀고 넓은 조망(眺望).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야기와 한자의 뜻을 맞추어 보려 해도 쉽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 서울의 곳곳의 거리가 배경이다. 깔리는 음악, 차분한 대사들이 보기 편했다. 그렇지만...


내가 아주 익숙한 거리에서 젊은 남녀가 대화를 하며 걷는다. 어르신이지만 나도 남자이기에 여자 주인공에 관심이 많다. 젊은 여자들의 긴 머리를 한 여주인공의 얼굴에서 유난히 코에 눈이 간다. 아주 오똑한 코가 내 눈에는 자연스럽지 않다. 순전히 내 생각이다. 그렇지만 영화 상영시간 내내 여주인공의 코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주 짧은 머리의 커리어 우먼이 나타났다. 시간이 한참 걸려 첫 번째 에피소드와 같은 여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코를 유심히 보다가 같은 여자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여자가 헤어스타일을 확 바꾸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래서 여자들이 자신의 일상이 마음에 안 들거나, 화나는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어 변신하고 싶을 때, 머리를 확 잘라버려 새로운 탄생을 하는구나. 그래서 헤어스타일을 바꿨는데 연인이나 남편이 알아봐 주지 않으면 심통을 부리나 보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주 우아하게 걷는 한 여인이 등장했다. 헤어스타일 역시 우아하다. 난 같은 배우란 걸 알아보지 못했다. 코를 한참 보니 심증이 간다. 헤어스타일이 여인의 분위기를 전혀 다르게 보여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남자도 머리 스타일이 남자의 분위기를 확 바꾸나? 그럼 난 어쩌냐? 스타일을 바꿀만한 머리카락이 별로 남지 않았는데...



未亡  : 남편은 죽었으나 따라 죽지 못하고 홀로 남아 있음.

미망인의 미망은 영화에서 보여준 한자와 다르다. 뜻을 읽다가 놀라 자빠질 뻔했다. 이런 의미를 아직도 사전에 뻔뻔스럽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에. 지금도 인도 시골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시체를 태우는 불 속으로 아내가 뛰어 들어가는 '사티'란 것이 간간히 행해진다고 읽었다. 주변 친척들이 은근히 또는 대놓고 강요한다는 얘기도 읽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 오랜 흔적이 아직도 사전에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이다.


'미망인'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뜻을 알고 있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여주인공의 오똑한 코에 내 시선이 집중되어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받았다. 쓸데없는 궁금증이지만 내 타고난 본능이라 어쩔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오똑한 코가 여주인공의 예쁜 얼굴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나 같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쁘고 덜 예쁘고, 우아하고 덜 우아하고 모두 아주 주관적이다. 정량화하여 측정하거나 계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두가 자연스럽게 자기 짝을 찾는 것 아닐까?


https://youtu.be/I0XDnNAChOQ?si=Uv9q3nZ41NV151g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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