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케터 강민호 Sep 07. 2022

당신은 절대 성공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부자 아빠의 비밀…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5년 후 어떤 삶을 살게 될 지 결정하는 한 가지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좋아한다는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 정체성의 실체는 바로 쾌락입니다. 누군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즐기는 것은 이 행위에 쾌락의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운동을 즐기는 것에는 운동을 하는 것에 대한 쾌락의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하는 사람은 게임이라는 행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는 행위, 술마시는 사람은 술마시는 행위,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을 읽는 행위에서 쾌락을 느낍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쾌락을 쫒는 존재입니다. 이 점에서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고 하는 점, 즉 인간의 존엄성 또한 이 지점에서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쾌락을 쫒는 존재임과 동시에 쾌락을 사회적.개인적 차원에서 스스로 통제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와, 읽고 있는 모든 독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쾌락을 쫒고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제도적 틀이 허용된 범주 안에서 말입니다. 이렇게 정해진 쾌락과 욕망의 틀을 벗어나는 행위를 우리는 범죄라고 규정하며 엄격하게 처벌합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인간에게 동물과 구별되는 존엄성을 부여하기 충분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게 됩니다. 사회적, 제도적 범주에 대한 합의와 원칙으로 판별이 가능한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쾌락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범죄자, 또 다른 하나는 이를 적절히 통제하는 일반인 입니다. 지구 상의 거의 모든 사회는 범죄자의 신체적 자유를 박탈함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본질적 구성요소를 훼손시킵니다.

(이 글에서는 존엄성을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와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저는 존엄성을 실존의 개념으로 다루겠습니다.)

 경제적 자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요즘들어 사용하는 빈도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 저는  경제적 자유라는 표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구성요소로 매우 실존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합의하고 제도가 규정하고 있는 틀을 벗어나, 쾌락과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 범죄자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수단은 신체적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경제적 자유의 측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논해본다면 어떨까요?

 저는 지금부터 아주 위험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피해갈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은 실존적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배고픈 사람이 무언가 사먹을 돈이 부족하여 먹을 것을 먹지 못한다면, 이것은 인간의 실질적 존엄성이 지켜지고 있는 것 입니까? 몸이 아픈 어떤 사람이 경제적 이유로 가장 적절한 치료를 받지못해 고통받고 있다면, 이것은 인간의 실질적 존엄성이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이 질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그 본질적인 부분은 침해할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은 바람직한 답변입니다. 그런 식의 논의라면 저도 동의 합니다.

하지만 저는 형이상학적으로 바람직하다라는 당위성의 차원이 아닌 실질적으로 그렇게 존재하는 지에 대한 실제성 여부를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는 명백한 참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자신이 존엄하다고 느낀다'라는 명제는 명백한 거짓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제적 자유의 침해로 인한 자존감 상실이 자기효능감의 단절로 이어질 때, 그 누구라도 자신의 실질적 존엄성을 침해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의 결핍은, 신체적 자유의 상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실질적인 존엄성을 침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성은 유지되겠지만요. 때문에 경제적 자유(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능력)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권에 가까운 필수요소 입니다. 그리고 기본권이란 모든 권리가 그러하듯, 자신이 그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적극적 의지로 관철시킬 수 있는 것 입니다.

 여기까지 동의가 되셨나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경제적 자유에 대한 (우리가 달성해야 할 최소한의)권리라는 표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서야 좀 더 논의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쾌락과 욕망을 언급하며 신체의 자유와 존엄성을, 경제적 자유를 언급하며 다시 존엄성을 이야기 했습니다.

 다시 쾌락과 욕망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정해진 사회적 합의의 범주 안에서 쾌락과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신체적 자유를 구속당하지 않는 첫번째 규칙입니다. 그렇다면 경제적 자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기 위해서도 무언가 규칙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여기에도 쾌락와 욕망의 원칙이 작동합니다 앞서 우리는 최소한의 존엄성을 위해 사회적 합의라는 틀 안에서 쾌락과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자유의 권리를 목적으로 한다면 우리의 목표는 달라져야 합니다.

 쾌락에는 즉각적 쾌락과 지속가능한 쾌락,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각적 쾌락은 말 그대로 무언가 행위에 바로 뒤따르는 쾌락입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바로 쾌락이 느껴집니다. 가지고 싶은 물건을 구매할 때 즉각적으로 쾌락이 느껴집니다. 잠을 더 자고 싶을 때, 잠을 자는 것 또한 바로 쾌락을 느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게임할 때, 술을 마실 때, 담배를 피우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행동을 하는순간 즉각적인 보상받습니다.

 이 즉각적인 쾌락은 본능에 가까운 것들 입니다. 그런데 이 본능이라는 것은 사실 동물의 특성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본질적으로 쾌락을 미루는 능력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절제와 인내입니다. 눈 앞에 놓인 쾌락과 욕망만을 쫒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회적 틀 안에서 행해지는 것일지라도, 적극적 자유와 권리(경제적 자유)행사에 도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쾌락을 미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책을 읽는 것 보다 술을 마시는 편이 당장에 쾌락과 보상을 위해 도움이 될텐데,  평일 저녁에 친구와 맛있는 식사를 하는 편이 즉각적 쾌락에 도움이 될테데, 그 시간에 운동을 하거나 일을 더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이들이 쾌락의 맛을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쾌락을 이런 식으로 미루는 사람들은 진짜 쾌락의 맛을 아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순간적 쾌락을 멀리하고 절제와 인내를 행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인 쾌락의 맛을 쫒습니다. 지금 이 순간 추구해야 할 행동의 준칙을 '지금 이 순간'에 두지 않습니다. 이들이 쫒는 쾌락의 시간은 5년, 10년 후에 맞춰져 있습니다. 순간적인 쾌락만 쫒는 사람들과는 쾌락의 수준이 다른 것 입니다.

 지속가능한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의사결정과 행동의 기준은 명료합니다. 지금 당장 선택해야 할 의사결정과 행동이 5년, 10년 후 성취의 쾌락을 주는 행위라면 기꺼이 그렇게 합니다. 결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지속가능한 질적 쾌락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루에도 수십번 씩 '쾌락의 수준'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잠을 잘 것인가, 운동을 갈 것인가.', '친구를 볼 것인가, 책을 볼 것인가.', '일을 할 것인가, 시간을 때울 것인가'... 사실  지속가능한 쾌락을 위해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간적인 쾌락을 선택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공할 것 인가, 아닌가'를 선택하라고 하면 이를 주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부자가 될 것인가, 가난하게 살 것인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를 뻔히 알면서도 능동적으로 후자의 선택합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할까?

당장의 즉각적인 쾌락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것을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인생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수많은 선택들을 통해 미래의 자신의 삶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미래의 나는 오늘의 내가 하는 선택으로 만들어 집니다. 우리가 선택한 즉각적인 쾌락의 배설물들은 절제와 인내의 강을 더럽히며 유유히 흘러갑니다. 그리고 이 강줄기는 결국 운명의 바다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기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책과 실제 삶 속에서 만났고, 또 나와 그들의 인생을 통해서 분명하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수많은 선택들이 '신호'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신호를 가볍게 여겨선 안됩니다. 작은 것은 곧 큰 것이 됩니다. 어떤 책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성공은 당신의 의무이자 사명이며 책임이다" _ <10배의 법칙, 그랜드 카돈, 부키>

 만약 당신이 매일 매일을 순간적인 쾌락이 아닌 지속가능한 쾌락의 선택을 한다면, 그리고 그 선택을 10년동안 꾸준히 추구한다면, 저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당신은 절대 성공을 피할 수 없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