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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바텐더 Jan 09. 2016

근본 없는 바텐더 #2

Being Bartender, #2

회사를 다니는 동안 술을 몇 병 집에 쌓아 두고 마시게 되었다. 이 술을 다 쓰면 다른 술을 사서 노리던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고, 그걸 다 마시면 또 다른 술을 사서 새로운 칵테일을 시험하는 식이었다. '남대문 던전'에서 술을 고르며 <다 먹을 수 있을까(1)>와 <취향에 안 맞으면 어떡하지(2)>를 고민했다. 그리고 가끔은 바에 갔다. 월급날엔 꼭 갔던 것 같다. 일이 힘들어도 월급날에는 원래 신이 나는 법이다. 

(1) 소량씩 쓰거나, 나의 술들만 가지고는 많은 종류를 만들 수 없는데 단독으로 마시기에는 애매해서 한 병 소비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크렘 드 민트크렘 드 카시스가 그랬다.
(2) 당시에 아니스가 들어 있는 리큐르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은 잘 마신다.

유독 일이 힘든 시즌이 있는 직업이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하고 새벽 2시에 퇴근을 하는 빡센 시즌 와중에도 존경스러운 워커홀릭 상사는 늘 사무실에 있었다. 자는 데도 시간이 부족해 거의 술을 마시지 못하고 첫 시즌을 일로 아등바등 흘려보냈다. 다행히 중간 상사는 술을 마시는 것을 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시즌이 대강 마무리가 되어 갈 때, 뒤풀이로 술 한 잔 먹으러 가자는 중간 상사에게 칵테일을 좋아한다고 했다. 중간 상사는 기가 막힌 가게가 있다며 룸살롱이 가득 있는 빌딩 지하로 인턴과 나를 안내했다. 룸살롱? 하고 어리둥절해 있다가 여의도에서 가장 오랫동안 칵테일을 만들어 왔다는 할아버지 바텐더를 보게 되었다. 술을 한 잔 마시고 즐겁게 집에 들어갔다. 직장생활 와중 곳곳의 바를 돌아다니게 되었던 계기가 된 거기는 요즘도 영업을 하지만 당최 사람이 많아져 요즘은 들어가 자리하기가 쉽지 않다. 아쉬운 노릇이다.


일은 힘들어도 보람차고 좋았으나, 문제는 나였다. 워커홀릭 상사는 일을 너무 잘 했고, 정말 잘 했고, 끝내주게 잘 했다. 그런 사람을 보다 내가 일을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그저 한숨이 나왔다. 절대적으로 무능한 것도 아니고, 상대적으로 무능한 게 이렇게나 괴롭다니! 하며 자책하다, 결국 퇴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퇴사한 날에는 술을 먹지 않았다. 원래 마케이누는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 


복학 핑계를 대고 퇴사를 했다가, 복학을 했다가, 한 학기만에 다시 휴학을 했다. 돈이 부족해서였다. 다른 계열 회사에 가서 일을 했다가, 독립해서 프리랜서 일을 하다가, 등록금과 용돈 할 만한 돈 약간을 쥐고 학교에 돌아가니 학교 앞 생태계가 바뀌어 있었다. 기둥에 외국 지폐가 덕지덕지 붙어 있던 '웨스턴 바'는 기묘한 부킹터가 되어 있었고, 새로 생겼다는 라운지 바에는 바 테이블 대신 싸구려 플라스틱 테이블만 잔뜩 있었고, 핫식스 예거 밤과 레몬이 들어간 모히토와 담터 아이스티 가루가 가라앉은 롱 아일랜드 아이스드 티를 팔았다. (3)

예거 밤엔 레드불, 모히토엔 라임, 롱티에는 술들과 콜라, 레몬/라임주스여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상 그 칵테일들은 일종의 이미테이션이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 다니며 마셨던 것들은 가격에 상응하는 좋은 것이었다고 쳐도, 직장에 다니기 전과 같은 칵테일들마저 열화돼 있다니! 처음에는 납득하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임대료 상승 폭을 듣고 나니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술과 임대료의 혼합물이면 당연히 비싼 것이다. 

만들어 먹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재미가 없는 부분은 얼른 생략하고 넘어가야겠다. 아무튼 <익명의 바텐더>이기도 하고. 

졸업을 목표로 썩 재미없는 음주환경에 강제로 처넣어진 암모나이트 복학생은 대학교 마지막 학기의 어느 날, 그냥/어쩌다가/충동적으로 바텐더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종종 바의 안쪽에서 바텐더가 될 궁리를 하다가 바텐더를 왜 하기로 했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요즘은 "그냥,  어쩌다가 보니까요."라고 대답한다. 대답하고 나서는 혼자 애매해한다. 바텐더라고 칭하는 것은 쉽지만, 바텐더가 '되는' 것은 조금 어렵기 때문이다. 완료가 되는 시점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늘 바텐더가 되는 상태가 지속중이어야 하니까. 


오늘도 좀 이따 밥 먹고 바텐더가 되러 간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아이고! 


헤더 사진 : Region 8 of the U.S. National Forest Service, Cleve "Red" Ketcham & Pi.1415926535(색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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