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명의 바텐더 Dec 02. 2020

바 테이블 위의 이야기, #2

손님이 술을 적당히 먹게 하는 방법

비가 많이 왔다. 봄 냄새가 나는가 했더니 장맛비 같은 게 그쳤다 쏟아지다를 거듭했다. 당연히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꾸준히 바를 찾아 주는 사람이 있어 가게는 돌아간다. 꾸준히 가게에 오는 손님이 유독 벌개진 얼굴로 들어섰다. 기름 냄새가 났다. 오늘은 치킨이냐고 물었다. 귀신 같이 맞추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후각도 후각이지만 우리 오래 봤잖아요, 하고 말했다.

맞아요, 오래 봤죠. 참 저 오늘이 그 날이에요. 어떤 날일까요? 그거 먹어 볼 날이요. 약간 탄식을 섞어 물었다. 아, 어느 쪽이예요. 헤어졌어요, 다시 짧게 탄식했다. 아.


손님은 마지막 저녁식사를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 그걸 이럴 때 먹어 봐야죠, 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보면, 자주 보는 사람의 주량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시점이 있다. 지금 앞에 있는 손님은 확실히 술을 썩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거’라 불린 술은, 불을 붙여서 내놓아야 하는 잔이다. 보통 상온에서 50도 이상이면 수월하게 불이 붙으니 보통은 이 손님이 좀 먹기 힘들어하는 독주라는 말이다.

Dragon’s Breath : 이름이 그럴싸해 동명이주가 많이 있다. 여기서는 시나몬 슈냅스, 아녜호 테킬라, 오버 프루프 주류 조합의 칵테일을 일컫는다. 1/3씩 쌓아 올린다.

까다로운 노릇일지도 모르겠지만, 가게에서 지나치게 독한 술을 제공하는 것은 최대한 삼가고 있다. 술을 가급적이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상태에서 마시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독한 술이 능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며, 다음날 손님이 좋지 못한 컨디션으로 일어나기를 원치 않는 까닭이다.


예외는 있다. 객기로 독주를 주문하려 드는 손님에게 이런 세 가지 예외에만 독주를 쥐어 준다 말린다. 무작스럽게 거절하는 것보다는 납득을 빨리 하기도 하고, 어떤-바텐더가 필요한-날 가게를 떠올리게 하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아 애용하는 방법이다.

군 입대 전

헤어졌을 때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일이 필요 없는 날, 딱 한 잔만 된다는 부연을 덧붙인다. 그러면 어느 날 이렇게 ‘그거’ 마실 날이라며 찾아오는 것이다.


시나몬 슈냅스 중 특출난 도수를 자랑하는 Firewater를 1/3정도 붓는다. 샷 잔의 벽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릴 수 있도록 바 스푼의 오목한 부분을 잔의 벽에 대고 테킬라와 오버 프루프 술을 차례로 붓는다. 바카디 151은 단종이다. 아쉬운 대로 예전에 확보해 둔 60도짜리 고량주를 올린다. 96짜리 보드카를 썼을 때는 더더욱 볼만했지만 지금은 사용할 수가 없다. 향의 조합이 더 풍성하면서도 제법 어색하지 않은 용의 숨결 어레인지가 완성되었다.


잠깐 불을 올렸다가, 마시기 전에 잔 위를 덮어 불을 끈다. 데면 안 되니 잠시 기다렸다가 내놓는다. 술을 조금 더 날려보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래도 온도 탓에, 마시기 전에 코를 가져다 대면 술의 향이 확 피어오르니 손님은 역시 마시기 전에 조금 망설이게 된다. 눈짓으로 안 마셔도 괜찮다는 시늉을 하면, 저렇게 눈을 질끈 감고 확, 마신다… 하나, 둘, 셋. 어후, 콜록콜록콜록!  그럴 줄 알았지. 왜 드래곤즈 브레스인지 이제 아시겠죠. 식도식도식도...위이이자아아앙 하고 스캔되는 것 같죠? 네. 불 뿜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거 맛은 정말 괜찮네요. 알아요. 하지만 한 잔 더는 못 드려요. 이제 무시무시한 거 드셨으니까 집에 가서 푹 주무셔야 돼요. 막 우셔도 되고요. 코노를 가셔도 돼요. 그래도 전화는 걸지 마시고요. 알겠죠? 네…


손님을 그렇게 집에 들여보냈다. 손님이 더 마시건 덜 마시건 알 게 뭐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적당한 음주는 굉장히 중요하다. 적당한 음주를 하지 못해 영영 음주를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사람들을 나는 제법 알고 있다. 손님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분들의 꾸준하고 건전한 음주를 위해서도, 손님에게 술을 적당히 먹게 해야만 한다.


손님의 간을 조지면 당장은 풍족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십 년 손님을 일 년 손님으로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핑계가 필요한 날이 있으니 딱 한 잔, 핑계를 만들어 두었다. 총 에탄올 양은 소주 석 잔이 되지 않지만, 태우는 느낌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런 알리바이의 한 잔을.


아마 손님의 기억력이나 운이 나빴다면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자리에서 친구들과 큰 소리로 욕을 하고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셨을 수도 있다. 그리고 새벽 두 시에 전화를 걸어 다음 날 끔찍한 숙취와 함께 끝내주는 흑역사를 만들었음을 깨닫고 영영 후회할 수도 있었다.


운이 좋게도 혹은 다행히도 손님은 내 핑계를 덥석 떠올려 주셨고, 홀로 정리할 시간을 가지기로 선택했다. 그 시간에 내가 어느 정도 끼어들 수 있게 허락해 줬고, 나는 적당히 손님이 술을 덜 마시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다음 날, 저희 화해했어요! 어휴 다행이네요. 전화 걸어서 깽판 부렸으면 망할 뻔했죠? 진짜 바텐더님이 말려서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게요. 어제 독한 거 드셨고 내일 주말이라서 데이트하실 테니까 오늘은 논알코올 드세요. 에엥 한잔만 안 되나요? 네 안됩니다. 제 말 들으세요. 에엥~

대강 이런 식이다. 다행이다.


+알코올 중독 증상을 보이는 손님은 입장을 거절한다. 그가 다른 곳에서 얼큰하게 취하건 아니건 상관없다. 알코올 중독으로 가게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시점에서 그는 내 손님으로 대우받을 자격을 잃는다.

+코로나 시대 이전의 에피소드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 테이블 위의 이야기,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