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구두를 신은 그녀는 분명 크리스틴이었다.
성우는 한걸음 물러나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무의식적인 자신의 행동에 그는 실소를 터뜨렸다. 크리스틴, 그녀라면 이미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 지도 몰랐다. 아무리 몸을 숨겨도 찾아낼 것 같았다. 숨겼다는 의도도 간파당할 것이다. 그나저나 왜 그녀를 보고 숨어야 하나. 그것이 마음이든 돈이든 둘 사이에 부채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귀던 사이도 아니었으니. 호텔 안으로 사라진 크리스틴을 보며 성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서류가방을 쥔 손에 땀이 흥건했다. 성우는 손수건을 꺼내 손과 이마에 베어나온 땀을 닦았다. 오늘 따라 유난히 부실했던 지하철의 냉방 탓이리라. 우디한 느낌이 섞인 머스크향이 땀 사이로 베어나왔다. 그가 취급하는 향수 ‘인티메이트’의 냄새였다. 생선장수의 체취처럼 향수의 냄새는 늘 코끝을 떠돌았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홍콩처럼 고온다습한 곳에서는 향수냄새가 더욱 짙게 퍼지곤 했다.
한때 조향사들에게 영감이 원천이 되었다는 인티메이트의 냄새는, 그리고 홍콩은 이제 그를 지치게 하는 애증의 연인같았다. 떠나지 못할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미련과 익숙함을 떨칠 만큼의 동기는 없었다. 그를 홍콩에 오게 만든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를 움직인 그 식상하고 아득한 단어를 떠올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꿈’, ‘희망’ 이런 단어들 말이다.
대학시절, 해외 취업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숫자를 맞추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자신의 전공인 회계를 좋아했다. 그는 장부로 상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까지.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그는 글로벌 회계법인에 취업했다. 숫자와 같이 정갈한 지표로 주인의 속성을 낱낱이 보여주는 회계일은 그와 잘 맞았다. 분배와 사용은 신중했고 가끔은 충동적이었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조작하는 경우마저 그 주인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장부였다. 더 넓은 세계에 사는 사람과 조직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물론 숫자를 통해서였다. 홍콩 지사의 리크루팅 공고를 본 그는 가슴이 뛰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까다로운 시험을 철저히 준비했고, 합격했다.
공항에 내린 순간의 숨이 막힐 듯한 습도와 기온에도 흡족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회사의 배려로 세 평 남짓한 원룸을 나름 저렴한 가격에 렌트할 수 있었다. 업무는 비슷했고 크게 힘든 일은 없었다. 처음엔 이국의 관광객처럼 주말마다 이곳저곳 다니기 시작했지만 곧 시들해졌다. 홍콩에 온지 일년 정도가 지났을 때 크리스틴이 입사했다. 한국인은 둘 뿐이었고, 이십대 후반의 비슷한 나이인 그들은 곧 친해졌다. 크리스틴은 그와 달리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했고 본사에서 파견되었다. 숫자너머의 대상을 읽는 감각과 일을 좋아하는 성향, 같은 한국인이라는 점에 둘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크리스틴은 무척 매력적인 여자였다.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둘은 토요일 11시에 만나 차찬탱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프렌치토스트는 버터가 녹기 전에 먹어야 하는 거야.”
크리스틴은 계란을 듬뿍 머금어 눅진한 토스트에 버터를 말아 입에 넣곤 했다. 보는 것 만으로도 느끼했지만 유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볶음국수를 앞접시에 덜었다. 그녀를 보며 이성을 파악하는 일에는 숫자보다 본능적 감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성우는 깨달았다. 인스피레이션, 본능적 영감 같은 것, 그러니까 삶의 보는 관점이 숫자말고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 그녀였다. 딱 거기까지였다. 확장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토요일 아침 열한시, 성우는 어쨌든 크리스틴과 함께하는 미도카페의 차찬탱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11시부터 30분간은 그녀가 좋아하는 프렌치토스트와 그가 좋아하는 볶음 국수를 모두 먹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주를 마무리하는 의식처럼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즐겼다. 식사 후엔 간단히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보고 간단히 이른 저녁을 먹은 후 해가 지기 전에 헤어졌다. 그녀를 보내고 침사추이의 해변을 바라보며 흡족히 보낸 한주를 되새겼다. 그는 자신의 고요한 홍콩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것이 무탈한 그런 날들이었다.
1년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흐릿했던 마음들은 조금씩 선명하게 조급해졌다. 조급하게 쌓인 시간은 실체를 갖춘 욕망이 되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때라고 성우는 생각했다. 우기와 맞물려 기온과 습도가 함께 치솟는 그런 여름이었다. 그날, 두 사람의 마지막 토요일 11시, 카페에 마주 앉은 그들은 언제나 처럼 토스트와 볶음국수를 시켰다. 조각낸 토스트를 먹다말고 그녀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토스트가 별로야?”
심드렁한 그의 질문에 크리스틴은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그 순간, 성우의 심장은 멎을 것 같았다. 귀기 어린 느낌이랄까, 그녀의 얼굴에선 묘한 생기가 흘렀다. 그것은 천둥이 친 후 몇 초후에 번뜩이는 푸른 전기나, 날카로운 칼에 손을 벤 후 터져 나오는 검붉은 피 같기도 했다. 국수를 집던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는 다급히 손을 뻗어 차를 마셨다.
“그거 내꺼야, 원앙차.”
크리스틴은 웃으며 그를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인스피레이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건 그것뿐이지. 특히 우리 같이 똑같은 일상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에겐. 근데 모험이 늘 그렇듯 실패를 안고 따라가야 해.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을거야.”
놀란 성우가 눈을 크게 떴다. 뜨거운 햇살이 테이블 위를 달구고 있었다. 혼란스런 느낌에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마음에 있는 무엇인가를 들킨 느낌이었다.
“산책 하면서 아이스크림 먹을래?”
이글거리는 태양이 정수리를 달구고 그의 심장도 함께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처음 느끼는 낯선 감정이 싫지 않아 그는 일부러 햇빛이 쨍한 해변가를 걸었다. 나란히 걷는 크리스틴과 자꾸 손과 팔이 스쳤다. 축축한 살갗이 닿는 느낌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스크림 가계를 향해 걸어가려는 크리스틴을 막아섰다. 그를 보는 그녀의 얼굴이 역광으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크리스틴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이든 하려던 그 순간, 역광속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그녀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왜 그래?”
그는 자신이 그녀의 손을 지나치게 꽉 잡았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손을 풀자 그녀의 팔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핏기없는 얼굴을 보며 그는 공포와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달아오른 심장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
“이제 11시에 만나지 않아도 돼. 모든 메뉴를 언제든 먹을 수 있거든.”
성우의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활짝 웃었다. 호텔로비의 그녀는 성우를 알아보았다. 기둥 뒤로 숨어버린 모습 역시 그녀가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사제안을 하는 크리스틴에게 성우는 무심결에 미도카페에서 아침식사를 하자고 말해버렸다. 아침 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호텔엔 그의 고객들이 묵고 있었다. 그들과 저녁 약속이 있기도 했지만, 사실 그녀와 이렇게 준비 없이 식사를 하고 싶진 않았다. 미도카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우연한 만남이지만 그저 예전과 변함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미도카페에서 만나는 것이다.
사실 크리스틴같은 유명인사를 어느 수준의 식당에서 만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옛친구로서,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장소라면 무난할지도 몰랐다. 그의 제안에 그녀는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명함을 쥐어준 그는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호텔 컨퍼런스 룸의 문을 열자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레브론 인티메이트, 경박한 웃음소리와 함께 향수 냄새는 오감을 틀어쥐듯 에워쌌다. 그 모든 것이 회의실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그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병원에 실려간 크리스틴이 영적인 능력으로 처음 본 것은 그의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교통사고였다. 서둘러 귀국한 그는 장례를 치르고 정신없이 어머니의 사업들을 정리해나갔다. 남대문에서 장사를 하던 어머니의 장부를 그는 처음 펼쳐보았다. 아버지 없이 금전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홍콩 원룸보다 좁은 남대문 수입상가의 모퉁이에서 그는 숫자로 너머의 것들을 보았다.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덧달린 장부는 수입상의 마진이 꽤 크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홍콩에서 일한다며? 장씨가 늘 자랑했거든. 이거 다 홍콩에서 오는 것들이라니까.”
남대문 수입상가안에서 그는 화장품 글로벌브랜드의 거의 모든 제품들을 볼 수 있었다. 손톱만한 브러쉬에서부터 2리터 짜리 바디제품까지 구할 수 없는 건 없었다. 홍콩이라는 나라의 축소판이 그곳에 있었다. ‘인스피레이션’. 그는 크리스틴의 말을 떠올렸다.
-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건 그것 뿐이지.
회사를 정리한 그는 매장을 정리한 후 어머니의 거래선과 연결된 무역상을 찾아갔다. 홍콩에 지소를 열고 코스메틱 전문 수입 일을 시작했다. 세무나 관세는 그가 잘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소매상 들이 흔쾌히 거래를 터주었다. 정확하고 꼼꼼한 일처리로 그의 거래처는 늘어났다. 숙소와 사무실을 겸한 오피스텔을 얻어 충실히 사업을 불려나갔다. 향수와 화장품들은 원가 비중이 낮기 때문에 직거래 방식으로 수입 하는 그와 거래를 하는 것이 상인들에게는 큰 이익이었다. 홍콩은 그에게 기회의 땅이 되어 있었다.
크리스틴이 병원으로 실려간 후, 그가 그녀를 다시 본 것은 7년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가끔 그녀를 떠올리긴 했지만 그 여름의 느낌, 여름의 태양볕을 한꺼번에 뒤집어 쓴 듯한 그 뜨겁고 축축한 느낌이 함께 머릿속을 휘젓곤 했다. 일상을 깨뜨릴 듯 강렬하고 그 불온한 느낌이 싫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후에 그만큼 강렬한 끌림을 느낀 이성은 없었다. 여자를 소개받기도 했지만 별 진전 없이 끝나곤 했다. 이후에 그는 그 끌림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크리스틴을 다시 보았을 때 알 것 같았다.
- 인생이 모험이라면 성공과 실패, 기쁨과 좌절을 함께 안고 가야 합니다. 거기에 저는 도움이 될 우산 하나를 드리는 거죠.
순두부찌개를 앞에 두고 그는 가계 모퉁이에 켜 둔 티브이에서 낯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크리스틴이었다. 잠시 한국에 온 그가 홍콩으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일부러 검색하지 않아도 가끔 포털사이트 뉴스에 뜨는 그녀의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인생 컨설턴트, 새바람을 일으킨 젊은 역술가. 그녀의 이름에 붙는 수식어들이었다. 그녀는 나를 기억할까. 찌개에 수저를 담그다 말고, 스마트폰을 들어 그녀의 이름을 검색했다. ‘크리스틴의 카운슬링 센터’ 강남에 있는 센터가 떴다. 이미지 창에 뜬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잠시 후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성우는 묵묵히 밥공기를 비웠다. 홍콩에 가면 미도카페를 들러야 겠다고 생각했다.
탄탄하던 사업은 2010년이 지나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글로벌브랜드들이 직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국내 쇼핑환경이 변화했다. 개인업자를 비롯해서 수입업자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직구 열풍도 큰 타격이 되었다. 남대문 수입상가는 이제 간신히 명맥만 남아 새로운 쇼핑형태에 적응하지 못하는 세대들을 상대할 뿐이었다. 수입하던 품목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는 불안한 장부를 안고 갈팡질팡했다.
“아직 레부롱 제품이 남았잖은가. 그건 자네 혼자 하니까.”
레브론 인티메이트. 이발소향, 포마드 향이라고 비웃던 제품이 이제 간신히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컨퍼런스 룸에 앉은 수입화장품 소매상인들은 어수선하게 앉아 웃고 떠들었다. 여행을 겸해 홍콩에 온 그들은 테이블에 놓인 양주병 모양이 인티메이트 향수를 장난스럽게 뿌려댔다. 향수냄새는 빠르게 그의 코 끝을 찔렀다. 머리가 아팠다. 그가 나눠준 인티메이트 향수와 다른 제품의 공급에 관한 자료를 사장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나중에 하고, 좋은데 어디 데려가 줄건가.”
그는 웃으며 여행일정이 적힌 프린트물을 나눠주었다. 딤섬도 먹는거지? 점보식당도 들어있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향수 냄새가 점점 짙게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아파왔다.
아침 9시, 모두들 호텔 서편 주차장에 모였다. 조식부페 대신 근처 식당에서 홍콩식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여행 일정이 시작되었다. 홍콩식 죽 콘지를 먹기 위해 그와 사람들은 호텔 부근 식당으로 향했다. 이국의 땅에서 나이든 이들에겐 토스트보다 죽이 나을 터였다. 사람들의 들뜬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그 안에서 그는 크리스틴을 생각했다. 그녀는, 미도카페에 나왔을까.
인티메이트 향이 코 끝에 끼쳐왔다. 구태의연하지만 누군가에겐 여전히 유혹적인 향일지 몰랐다. 1950년대에 출시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코코샤넬과 입생로랑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그 향은 그러나 이제 쾌쾌한 이발소냄새 취급을 받을 뿐이다. 그는 크리스틴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말한 인스피레이션, 영감이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크리스틴, 정미도, 함께 식사를 하고 손에 닿을 듯 그의 앞에 있던 그녀가 바로 그의 영감이었다는 것을.
식당에 들어선 그는 음식 냄새와 역하게 섞이고 있는 향수 냄새를 맡으며 비프콘지 여섯 개를 주문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프렌치토스트와 커피를 추가했다. 전원을 꺼버린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 잠시 후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다. 방향이 바뀐 에어컨 바람을 타고 짙은 향수냄새 섞인 프렌치토스트 굽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