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발이에요. 100송이라니까요!”
인포메이션의 전화를 받은 것은 오전회의가 끝나고 난 직후였다. 임원들이 빠져나간 회의실을 뒷정리하는 것도 비서실의 일이었다. 회의록을 저장하고 회의실의 자잘한 비품들을 정리하던 윤대리는 전화를 받은 내 앞에서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가서 얼른 가져와. 나도 궁금하다.”
고개를 살짝 숙인 윤대리는 들뜬 표정으로 잽싸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성실하고 예쁜 윤대리는 회사 안팎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녀의 예쁨은 생김새의 아름다움과 함께 밝고 건강함의 에너지가 있었다. 일까지 빈틈없이 해내니, 비서실 선배로서 난 참 복도 많다 싶을때가 많았다.
“와, 대단하구나!”
추파춥스보다 큰 붉은 장미들이 피고 오므리고 고개를 들고 숙이고.. 아주 난리였다. 무거운 꽃바구니를 들고 오느라, 그보다 더 큰 쑥스러움과 기쁨으로 윤대리의 얼굴은 장미보다 더 예쁘게 붉어져 있었다. 꽃송이, 데코레이션, 소소한 리본과 메시지카드까지 돈을 아끼지 않은 고급스러움이 넘쳤다. 메시지 카드에 적힌 이름은, 예상한대로 K쉐프였다.
“윤대리도 그 사람 맘에 들어?”
얼굴을 붉히며 활짝 웃는 그녀의 표정 안에 깃든 단호함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세 번은 보고, 진지하게 만날건지 판단해봐야 겠죠?”
“그럼 오늘이 첫 데이트?”
윤대리는 복숭아빛 얼굴을 더 화사하게 빛내며 활짝 웃었다.
윤대리와 K가 만난 것은 회사에서 그의 이름을 딴 고급 즉석요리 브랜드를 론칭하기 위해 그가 회사를 드나들면서였다. 비서실에 있던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며 데이트를 신청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미혼에 남자친구가 있는 상황도 아니니, 윤대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핫한 먹방 예능의 중심, 그보다 좀 더 고급스러운 고급 한식 다이닝의 중심에 ‘쉐프 K’가 있었다.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궁중요리 전문가인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아 요리를 시작했다. 유럽의 유명학교들을 다니며 공부했지만, 그는 결국 한식으로 돌아왔다. 압구정에 연 파인 다이닝 ‘食, Ku’는 예약이 힘든 곳으로 유명했다. 잘 생긴 외모와 조각같은 몸-이건, 얼마전 남성지에서 찍은 그의 화보를 보고 확인한 팩트다! 조각같은 근육질의 알몸에 쉐프 앞치마만 두른 모습은 조금 웃겼지만...- 으로 공중파의 예능 어디서나 그가 나왔다. 그는 요즘 요리를 할까? 식당에 요리사가 그 하나일 리는 없지만 의아하고 궁금했다. 윤대리에게 물어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연애에 나의 저급한 호기심이 끼어드는게 좀 미안했다.
그와 진행할 제품은 조금 더 고급화한 국, 탕 레토르트, 비빔밥이나 해장국 등의 일품식, 그리고 만두였다. 이미 인지도 높은 대기업이 있었지만 앞으로 더욱 확장될 시장이었다. 회사가 쌓은 인지도에 쉐프 K의 전문적이고 젊은 이미지가 더해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라고 했다. 대행사들이 밥먹고 하는 일이 그럴듯한 팩트를 만드는 것이니 그럭저럭 수긍은 갔다.
“경계 대상 중의 하나가 바로 본업을 등한시하면서 그걸로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야.”
유명 가수의 곱창집에서 누린내가 가시지 않은 곱창을 휴지로 감싸 뱉어내며 크리스틴이 말했다. 초등학교 동창인 그녀는 죽이 잘 맞는 친구이기도 했지만 돈과 인생의 투자에 대한 소중한 조언자였다. 우연한 기회에 신내림을 받아 진짜 역술가가 되기도 했지만 사실 크리스틴, 그러니까 나의 친구 미도는 예전부터 늙은이같은 통찰력이 있었다. 사실 그녀의 예언과 조언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귀담아듣지 않는 인생의 평범한 진리들이 대부분이었다. ‘성실해라, 꾸준히 뭐든 해라’ 이런 종류. 그 진리들 중 특정한 것들이 필요한 시기가 있고, 그녀의 역할은 그것을 안내하는 것 같았다. 뭐, 그녀가 내게 이런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사람은 또 아니야. 눈동자가 흔들린다는 다는 건, 몸은 더 많이, 그리고 몸을 쥔 정신과 주변은 지진이 나 있다는 뜻이거든.”
“나도 안다고 친구야. 근데 정신이 나가있을 만큼 연애를 하면 흔들리는 눈빛에 같이 흔들려 아무것도 안보인다고요!”
그때 크리스틴은 피식 웃으며 이야기 했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지기 전에 그걸 봐야하는 거지.”
커다란 찐만두 모자를 쓴 쉐프 K의 광고사진은 좀 우스꽝스러웠다. 약간 조악하고 빈티지하게, 유머러스하며 오랜 인상을 남길 사진을 임원진이 원했다고 했다. 어쨌거나 회사 직원들 사이에 K는 만두남이 되었다. 그리고 윤대리는 그녀가 좋아하는 이태리 식당에서 첫 데이트를 마치고 들뜬 얼굴로 돌아왔다. 정말 좋았는지 이성을 만나는 사람 특유의 화사한 기운이 윤대리를 떠돌았다.
“어때, 계속 만날거야?”
윤대리는 짙은 눈썹을 살짝 모으다가 벌어지려는 입술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두어번은 더 보고 생각해 보려고요.”
“만두남이 적극적이구나! 자기도 맘이 있네 있어! 내 주변에 유명한 사람과 만나는 사람도 있고, 신기해.”
“그 사람 의외로 소탈하고 성실해요. 지금도 틈틈이 자기 식당 음식은 다 직접하려고 애쓴대요.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거 아니야? 자기 이름 걸고 하는 식당이고 사람들은 만두남 음식먹으러 오는 거잖아.”
나의 말에 윤대리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네요. 그건 당연한건데. 제가 또.... 사람 후광에 당연한 걸 놓칠 뻔했어요. 그러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감사합니다.”
역시 윤대리다. 나는 가볍게 크리스틴이 내게 해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 데이트는 그의 식당에서 하자고 해야 겠어요. 그 사람 요리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직접한다니까..”
그 유명한 ‘식구’에 드디어 가 보는 거야? 나는 탄성을 질렀다. 진심으로 그가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임원실 회의자료에 섞인 만두 모자를 쓴 K가 갑자기 더 멋져 보였다.
한주가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월요일 출근이 이처럼 두근대는 날도 드물었다. 주말동안 업데이트된 그녀의 데이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날이었다. 특히 쉐프 K의 레스토랑에 다녀온 주말이니만큼 기대가 더욱 컸다. 월요일 출근을 기분좋게 해 주는 윤대리에게 고마운 기분이었다. 아침 회의를 위한 회의실 세팅을 시작했다. 회의 자료를 들고 온 광고팀의 민과장이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 안건 중에 ‘쉐프 K’ 라인의 제품별 광고와 제품 개발 상황에 대한 최종보고가 있었다. 임원 회의실에 놓인 K의 얼굴을 한번 째려봤다. 윤대리에게 상처라도 주는 날엔 가만 있지 않을테니. 나는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사진을 툭툭 소리나게 쳤다.
“벌써 세팅이 끝났네요!”
“아, 내가 좀 일찍 왔지.”
윤대리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회의실에 모두 들어가고 난 후, 우리는 한숨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적어도 두 시간은 여유가 있다. 잠시 탕비실에 들어간 윤대리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회의용 케이터링 메뉴였다. 커피를 마신 그녀는 연어샌드위치를 한입베어물고 탄성을 질렀다.
“맛있다! 어제 저녁부터 거의 못 먹어요. 역시, 이집 샌드위치는 정말 최고야!”
약간 격앙된 그녀의 목소리가 수상하게 들렸다. 물론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제 쉐프 K의 레스토랑에 다녀오신 몸이 아닌가.
“주말 식사 어땠어? ‘食 Ku' 거기 간거 아니야?”
“물론 다녀왔어요.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커피를 마신 그녀는 피식 웃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압구정 주택가에 위치한 식당은 인터넷에서 본 것보다 멋진 식당이었다. 서까래부터 인공정원까지 한옥의 느낌을 살린 인테리어는 물론, 직원들의 유니폼 매듭까지 정성을 다한 것이 느껴졌다. 홀과 룸, 그리고 VIP를 위한 특별한 별채가 있었는데 정원과 후원을 모두 보며 음식을 즐길수 있었다. 별채에서 그를 기다리며 메뉴판을 본 그녀는 많이 놀랐다. 코스는 물론, 단품메뉴도 무척 비싼 편이었다. 새콤한 오미자차를 마시며 정원을 보고 있자니 놀랄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늘분의 녹화가 늦어지고 있어서 조금 늦게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공간에서라면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저녁시간이 지나 슬슬 출출해졌다. 메뉴판을 펼쳐 단품메뉴들을 살펴보았다.
- 신선한 유기농 부추, 강릉 두부, 엄선된 돼지고기 등 최고의 속재료를 손반죽한 만두피로 감싸 만든 담백한 한식 만두
그래, 이거다! 단순한 조리법의 음식이 식당의 진가를 알려주는 법이지. 워낙에 만두를 좋아하고 그가 런칭할 만두의 포인트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는 만두를 주문했다. 메뉴판의 가격대로라면 만두 하나에 삼천원이 넘는 셈이었다. 진심으로 기대되었다.
“방송출연으로 바쁘지만, 근본은 언제나 요리를 생각해요. 조만간 다 정리할겁니다. 식당 마케팅을 위해 한번쯤은 이렇게 움직여줄 필요가 있죠.”
그녀는 그렇다고 그렇게 몸까지 만들어가며 화보를 찍을 필요가 있었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었다. 몸을 만들기 위해 음식조절을 했을텐데 그러면 식당에서 일하는게 가능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마케팅의 일환이라니 프로페셔널한 면은 본받을 만 하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그녀 앞에 앉아있는 남자는 일단은 너무 멋있고 잘생긴 사람이었으니.
오늘 음식은 어떨까? 식품회사에 다니며 쌓은 맛의 내공을 오늘 한번 펼쳐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주문하신 만두입니다.”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는 유명 도예가의 접시위에 그림처럼 길죽하고 큼직한 만두 여섯 개가 올려져 있었다. 초여름의 플레이팅 테마는 버드나무 인가보다. 푸른 잎사귀가 만두사이에서 분수처럼 뻗어나가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김이 오르는 만두는, 그런데 만두피의 두께와 주름이 너무 일정했다. 만두용 프레스의 힘을 빌린 모양이다. 그녀는 젓가락을 들어 만두를 집어 올렸다. 보름달처럼 세팅된 초간장 그릇에 살짝 담근 후 입으로 가져갔다.
**
“근데, 근데 정말 맛있었어? 인생만두, 뭐 그런거야?”
너무 궁금해진 나는 입을 다문 윤대리를 채근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게... 과장님, 거기서 제 냉동실에 있는 만두 맛이 나더라고요."
설마! 나는 말도 안된다는 얼굴로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녀는 화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비비고 한섬만두요..... 저도 제 입을 의심했지만, 그 만두를 특별히 좋아해서 엄청 사다먹었거든요. 세상에, 모양도 똑같잖아요. 어이없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는데 마침 별실 정원에 직원이 한명 오더라고요. 딱 봐도 앳되 보이는 막내 직원이 연못에 뜬 나뭇잎을 건지고 있더라고요.”
윤대리는 그를 불러 오미자차를 한잔 더 요청하면서 생각난 듯 만두 접시를 가리켰다.
“이거, 비비고죠? 우리 회사꺼 쓰지. 이제 쉐프님 라인도 나오는데 말이에요.”
“네, 한섬만두랍니다. 제품 출시되면 비비고 말고 그거 쓰실거라고 하셨어요.”
직원은 해맑게 웃으며 걷어올린 나뭇잎들을 그러모아 본관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먹다만 만두를 뒤로하고 별채에서 나왔다.
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고 윤대리를 바라보았다. 샌드위치를 깨끗이 먹어치우고 커피를 마신 그녀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과장님이 보기에도 제가 연인보다는 거래처 느낌이에요? 어제 최선을 다해 화장하고 꾸몄는데.”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조용히 소리내어 웃었다. 조만간 윤대리와 진짜 맛있는 만두집을 한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비고 따위는 싹 잊어버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