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먼저 오고, 강이 왔다.
지하철이 잠실철교 위를 지나는 7시 40분 전후의 시간, 12월의 해는 수면에 아슬하게 걸려 빛을 뿜어낸다. 스마트폰을 향해 숙여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약간의 수런거림과 함께 창밖으로 향한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서로의 틈을 비집고 차오르는 빛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문 옆 모서리에 몸을 묻듯 서 있던 그녀는 철교에 다가가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늘조각같은 빛조각을 피하듯 이마에 손우산을 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강표면을 튀어 얼굴 옆으로 스쳐가던 햇살 파편이 점점 그 자리에 머물러 서다가 끝내 눈썹 위에 걸려 눈을 찌르는 것을 느낀다. 얼굴을 돌리고 눈을 감는다.
지하철이 멈췄다. 아침 시간에 흔히 있는 연착이었다. 지하철 안의 공기가 쓰러지듯 누웠다가 부풀어 오른다. 강물에 반사된 빛이 태연하게 지하철을 환히 비추며 데우기 시작한다. 문가에 선 그녀는 스마트 폰을 바라본다. 7시 46분. 집에서 나온 지 46분이 지났다. 마을버스를 오르내려 지하철 계단을 끊임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70분간의 여정 속에 오늘도 있다. 부푼 공기 속에서 누군가의 짜증섞인 통화가 들려왔다. 동조와 채근의 공기가 건조한 히터 바람과 함께 얼굴에 와 닿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검은 앵글부츠 오른쪽 앞코가 살짝 눌려 있다. 뛰듯이 오르내리는 계단 모서리에 부딪혔거나 누군가 밟고 지나간 흔적일 터였다. 원인은 알 수 없고 상처만 남았다. 다른 구두가 있었고 살 수도 있었지만 신발을 벗고 나면 필요는 사라지고 아침에 되면 다시 익숙한 구두에 발을 넣었다. 오늘 아침에도 반복한 습관의 웅덩이에 빛이 고였다.
“운동화 신고 출근하세요. 업무용 구두 회사에 하나 두시고요. 요즘 다 운동화 신어요!”
회잿빛으로 보이는, 원래는 흰색이었을 운동화를 슬리퍼로 갈아 신던 정대리가 그녀의 구두를 보며 말했다. ‘자연스러운 낡음’이 장식이라는 고가의 운동화를 정대리는 소중히 책상 아래 넣어 두고 사내용 검은 구두로 갈아 신었다. 그녀도 회의용으로 신는 구두가 회사에 있긴 하지만 출근 복장에 운동화는 어색했다. 20년간 계속해온 습관이었다.
강물에 반사된 빛까지 더해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볕은 점점 더 풍성해 진다. 앞 코의 움푹 들어간 자국에 볕이 고이며 검은 구두의 몸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흠집과 잔주름, 상처투성이의 신발을 이제는 바꿔야겠다고 생각한다. 자세를 바꾼 그녀는 다시 유리창 너머 강 저편을 바라보았다. 해가 뜨고 빛의 각도가 바뀌며 눈에 들어오지 않던 회색 건물이 보였다. 6개월간 그녀가 드나들었고 한 달 이상 입원했던 종합병원이다. 풍부하게 반사되는 햇빛 속에서도 병원의 회색은 바래지 않고 회색이었다. 비 내리기 십 분 전의 묵직한 하늘 빛, 그 무엇에도 때타지 않고 냉정함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침묵의 색.
*
입사 20주년 기념으로 그녀는 회사에서 금 열 돈으로 만든 황금열쇠와 강 저편에 있는 병원의 건강검진권을 선물로 받았다. 매번 회사에서 받던 건강진과는 다른, 몸 구석구석을 치밀하게 검사해 볼 수 있는 고가의 검사가 포함된 프리미엄 검진권이라고 했다. 그동안 회사에서 잘 썼으니 삐걱이는 곳 없나 한번 살피라는 거네. 언니는 그녀가 내민 건강 검진권을 툭 치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빠도 네가 쓰는 게 맞다고 하셔. 언니는 쑥물이 든 티셔츠를 무심히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 명절이 지난 집과 가계에선 늘 짙은 쑥 냄새가 났다.
강릉에서 서울까지 제 속도로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했다. 언니와 아빠가 떡을 찌기 시작하고 문을 열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 살림집과 붙은 가계에선 곡물 냄새를 품은 따뜻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고 언니는 무심히 김치통을 그녀의 트렁크에 넣었다. 냉장고에 김치는 있어야지. 자매는 마주보고 설핏 웃는다.시동을 걸고 백미러로 그녀는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언니를 바라본다. 이혼 하고 집에 내려 온 언니, 홀로 된 아버지 곁에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행, 도대체 무엇이 다행이란 말이었는지.
언니가 양보한 검진권 덕에 그녀는 턱밑 갑상샘에 암이 자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전이형태로 위에도 초기 암세포의 소견이 보인다고 했다. 갑상샘암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다행이라고 했다. 그건 암도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은 웃으며 그녀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금방 나을 거라고, 요즘은 의학의 발전으로 흔해진 암이라고. 그녀는 그 말들이 몸에 고여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를 다시 흐르지 않는 강물처럼 말들은 흘러 빠져나갔어야 했다. 별것 아니에요. 의학이 발달해서 잘 보이는 거고, 그건 암도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들을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그대로 전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선 말이 없었다. 아빠, 우는 거야? 별거 아니라잖아요. 치료하면 낫는다고. 병원비도 회사에서 다 줘요. 언니의 목소리가 아버지의 숨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씨팔, 나더러 어떡하라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팽팽하게 부푼 객차안의 공기를 갈라놓았다. 두툼한 터틀넥과 캐시미어 스웨터에 싸인 목 부근의 흉터가 반응하듯 움찔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나는 흐르고 있는 것이 맞을까. 유리에 얼굴을 붙이고 강물을 바라본다. 햇빛을 반사하며 편도로 흐르는 강물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흐를 뿐이다.
그림을 그리고 목공을 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집에 말하려는 그 때 어머니가 쓰러지셨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 담임이 권하는 대로 이과를 선택했고 생명공학을 공부했다. 생명‘의’ 공학이라는 말이 근사 했지만, 그냥 ‘생명공학’ 이었다. 염두에 없던 진로는 교수의 권유로 대학원 진학에서 교수 친구가 시작한 바이오벤처에 취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후로 검은 구두들이 20년간 그녀와 함께 강을 건너며 낡아가기 시작했다. 회사는 성장했고 그녀는 중년이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을 취미로라도 꾸준히 해보라는 누군가의 조언에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쳤다. 먹고 사는 일에 소모하는 에너지 사이에 우아한 열정을 들일 여유가 그녀에겐 없었다. 남은 열정을 그러모아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사실은 슬픔으로 그녀에게 다가올 뿐이었다.
*
마스크 속에서 숨을 내쉬던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오른쪽 구두의 이지러진 코 끝엔 구두의 자잘한 틈 속을 빈틈없이 비추고 흘러들어간 밝은 아침 햇살이 고여 있다. 당장 신발을 벗고 낡은 구두를 강물에 던져버리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베이지색 모직양말을 신은 발바닥 그대로, 깨끔발을 디디며 조바심 내지 않고 바닥을 딛고 천천히 걸어 잠실역에 내린다. 개찰구를 지나 지하상가 신발가계로 향한다. 새까매진 발바닥을 짱구 캐릭터가 그려진 슬리퍼에 집어넣는다. 상가 구석에 있는 분식집에서 떡볶기와 붕어빵, 오뎅을 먹고 다시 개찰구로 들어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늘 생각했던 일을 이제는 하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창밖의 강 표면이 바람에 불어온다. 강의 주름이 일렁이며 물보라를 튕겨 낸다. 물결은 공기의 숨결을 타고 흔들리지만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흐르고 싶다고, 흘러서 다른 시간의 숨결을 타고 싶다고 생각한다. 간절히, 숨결의 표면에 반사될 빛을 그리고 싶다. 밟힌 구두코에 고인 빛을 쏟아내고 쏟아지는 빛을 내 안에 담는, 그런 순간을 맞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앞선 열차의 고장으로 열차가 잠시 연착되었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드리며 잠시 후에 열차 잠실 나루 역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불편을 드려 다시한번 죄송합니다.
목이 덜 풀린 기관사의 목소리에 열차 안 공기는 수런거림으로 차 올랐다. 사람들은 물에 잠긴 수초처럼 누웠다가 휩쓸린 물결에 물방울 튕기며 일어나는 미역처럼 스마트 폰에 눈을 두었다. 지하철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강물이 튀겨낸 빛은 일시에 사라진다. 햇살처럼 일시에 파고들며 곰팡이처럼 자라는 잡념을 태우듯 조명하던 불편한 연착의 햇살은 지하철의 움직임에 순식간에 잠식되고 만다.
순식간에 지하로 들어간 지하철엔 창백한 인공조명만이 남았다. 구두에 고인 빛 도한 일시에 비워지고 주름은 이면의 어둠으로 가려졌다. 환승역인 잠실역에서 그녀는 인파에 쓸려 함께 내린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도착에 그녀는 구두굽을 또각이며 계단에서 튕기듯 벗어나 뛰듯이 걸었다. 짱구가 그려진 먼지 쌓인 슬리퍼가 놓인 신발가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떡볶이와 오뎅 냄새가 섞인 공기를 가쁘게 헤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지상에 나온 그녀의 얼굴에 찬 공기가 닿았다. 닳기 시작한 굽은 보도블럭 위에서 빠른 간격으로 선명히 부딪히는 소리는 냈다. 내일은 다른 구두를 신고 나오자고 아니, 퇴근길에 새 구두를 사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다. 로비에 들어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ID카드를 꺼내 출구에 댄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낯익은 동료들이 웃으며 목례를 건넨다. 조심스럽게 붐비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끼워 넣는다.
8층으로 오르며 그녀는 오늘이라는, 익숙하고 지루한 강을 다시 한 번 건널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