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소설의 대가, 김용 선생의 별세의 즈음하여
무협 소설의 대가, 김용 선생이 별세하셨다.
나는 79년生인데,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서 김용 선생의 작품을 한 번은 마주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영웅문 3부작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 도룡기)는 너무 유명했다. 중고등학교 때 학교에 가져와서 친구들끼리 돌려 읽는 경우가 많았다. 이 중에 내가 가장 좋아했고 기억에 남는 작품은 ‘의천도룡기’다.
‘의천도룡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20부작의 VHS 비디오(20대 초반의 어린 양조위가 주인공인 ‘장무기'로 나온다)로 접했고, 고등학교 때와 직장인 초년차에 책으로 다시 접했다.
의천도룡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광명정 전투’ 장면을 이야기할 것이다.
강호의 고수들 사이에서, 그것을 얻는 자는 무림지존이 된다고 알려진 ‘도룡도’를 사파인 ‘명교'가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무당파, 아미파, 곤륜파 등 무림의 명문 정파들이 (사악한) 사파를 소탕한다는 명분과 그 외의 명교와 엮인 이런 저런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연합해서 명교의 본진인 '광명정'을 습격해 명교의 고수들을 하나씩 꺾기 시작한다. 명교에서도 고수들이 많지만, 여러 명문 정파가 연합해서 덤비는데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
광명정 전투에서 공격을 당한 모든 명교의 고수들이 부상을 당하고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명교의 사람들은 의연하게 죽음을 택하며, 다 같이 앉아서 명교의 교리를 읊기 시작하는데 (대체로 여기에 등장하는 '명교'는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로 해석한다) 그 구절은 "어차피 결국 우리는 불에 타 먼지처럼 사라질 존재다. 널리 세상을 밝히는데 인생을 바치고, 삶과 죽음에는 연연하지 말자"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린 마음에 나는 이 장면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물론 이 장면 이후에 우리의 히어로, ‘장무기’가 나타나 고강한 무공으로 사태를 중재하고 명교를 구하긴 한다)
소위 ‘명문 정파’라는 사람들이 권력(도룡도)에 눈이 멀어서 수적으로 열세인 명교를 비겁하고 무자비하게 몰아붙일 때, ‘사파’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이 대의를 위해 의연하게 죽음을 불사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광명정 전투'의 장면은, 과연 무엇이 사파이고 무엇이 명문 정파 인지 되묻게 한다.
김용 선생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게 아닐까.
명문 정파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사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정파가 사파가 되고, 사파가 정파가 된다.
어떤 파에 속해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거다
명문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다닌다고 다가 아니다.
그리고 남들 눈에 좀 이상해 보여도 함부로 손가락질하거나 괴롭히지 마라. 너희들보다 더 진실 되게 사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너는 대의를 위해서 다 희생할 수 있는가?
김용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