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초보 무사(武士)의 좌충우돌 성장 스토리
옛날에 고등학교 때 들은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대강 이런 식이다.
옛날에 당구의 신(神)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살았다. 당구를 너무 잘 치고 싶었던 한 소년이 그 고수를 찾아갔다. 몇 번의 읍소 끝에 소년은 고수의 제자가 되었는데, 고수는 제자에게 첫 3년 동안은 당구채(큐대)에 초크를 묻히는 연습만 시켰다. 그리고 다음 3년은 큐대를 잡는 연습만 시켰다. 그 다음에 당구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그 고수는 그만 노환으로 죽고 말았다.
고수가 사망했고 그 제자가 당구를 잘 친다는 소문을 들은 다른 지역의 고수가 제자를 찾아왔다. 당구 대결을 시작했는데, 다른 지역의 고수는 제자가 큐대에 초크를 묻히는 모습을 보고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패배를 인정하고 떠난다. 이번에는 또 다른 지역의 고수가 제자를 찾아와서 대결을 했는데, 그 고수는 제자가 큐대에 초크를 묻히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고, 큐대를 잡는 모습까지 보고는 더 이상 해봤자 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패배를 선언하고 떠난다. 그다음에 또 다른 고수가 찾아왔는데, 큐대에 초크를 묻히는 모습과 큐대를 잡는 모습 둘다에 엄청난 위협을 느꼈지만 게임을 더 진행하기로 한다. 이윽고 당구게임이 시작되었는데, 고수의 제자가 큐대를 잡고는 20점을 빼더니 이렇게 외쳤다 "돛대!". 결국 제자의 실력은 30점(=당구 완전 초보 실력)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이러한 서사 구조,
1)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고수를 찾아가서 대결하는 이야기(소위 말하는 ‘도장 깨기’)"
2) "전투에 임하기 앞서 몸짓이나 눈빛, 대화로서 이미 상대를 파악하거나 제압한다는 이야기"가 바로 내가 최근에 읽은, 요시카와 에이지라는 작가가 쓴 '미야모토 무사시'의 서사구조와 기본적인 면에서는 일치하기 때문이다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소설은 한마디로 하수가 고수로 성장하는 스토리다. 무협지적인 유치함도 분명히 있지만,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인물과 그 스토리가 일본의 사람들, 그리고 다른 일본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고수와 하수는 어떻게 다른가? 고수는 어떻게 사고하는가? 하수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하수가 고수가 되는 데 있어서 장애물은 무엇인가?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점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이 소설은 일본 역사상 최대의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장면에서 시작한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아주 유명한 전투라서, 일본 사람들에게 “여기가 우리의 세키가하라 전투다”라는 말은 “여기가 우리의 승부처다”라는 의미로 통한다고 한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젊은 혈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패잔병으로 살아남는다. 이 후로 다쿠안 스님이라는 분을 만나기 전까지 미야모토 무사시는 완전히 삐뚤어진 상태에서 패잔병으로 쫓겨 다니며 광포하게 행동하다가 살인자로 몰려 관군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다. 다쿠안 스님은 미야모토 무사시를 잡아 높은 나무에 묶어 매달고 그에게 죽음을 맛보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 미야모토 무사시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무사 수행자의 길로 들어선다. “나는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 “나는 이미 죽었다”는 생각이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원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후에 어떤 겪을 도전이나 굴욕도 무사시는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개인적인 수련 이후로 자신의 수준을 끊임없이 점검받는다. 수행을 통해 자신감을 쌓았지만, 그 자신감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는 싸워봐야 아는 법, 미야모토 무사시는 전국의 도장을 찾아다니며 고수들과 겨룬다. 이 과정에서 맞을 수도 다칠 수도 죽을 수도 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싸울까, 어떻게 하면 더 고수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부족한 것을 고칠 수 있을까가 미야모토 무사시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고 가장 깊었던 장면은 검술의 달인 세키가와 야규(이 사람도 당대의 고수였기 때문에 결투를 원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가 자신과의 대결을 위해 찾아온 무사들에게 병치례를 핑계로 대결 거절을 알리면서 국화꽃을 전달하는 장면이다. 사실 그 국화꽃은 그냥 거절의 선물이 아니었다. 그 국화꽃 줄기가 잘린 단면은 고수가 아니면 절대 자를 수 없는 형태로 잘린 국화였기 때문에, 찾아온 무사들이 이것을 알아본다면 싸우지 않고도 세키가와 야규의 실력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키가와 야규를 찾아온 무사들은 국화 꽂을 유심히 보지 않고 그냥 버린다. 하지만 미야모토 무사시는 버려진 국화꽃을 유심히 살펴보고, 메시지를 알아챈다. 결국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 국화를 실마리로 세키가와 야규에게 접근해서 가르침을 얻는다.
사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이름을 떨치는데 가장 결정적이었던 대결이 70대 1로 싸워서 요시오카 일족을 멸문시킨 전투인데, 아무리 그가 고수고 아무리 이 소설이 무협지라도 “그게 말이 되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가 그래도 수긍이 갔던 점은 그가 일반적인 정공법으로 70명을 상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형지물에 대한 파악과 전투 상황에 대한 치밀한 전략도 있었고, 그의 전투 방법도 당대로서는 특이 했다. 그는 양손에 두 개의 칼을 쥐고 (한 손에는 장검, 한 손에는 단검) 싸우는 소위 “이도류(二刀流)”를 창안했는데, 이를 통해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런 무기 운용을 통해서 그는 다수의 적과 대결할 수 있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이도류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상황과 전술에 맞게 무기를 사용할 뿐 두 개의 검이라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무사로서 성장하면서 결국에 느끼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실력을 갈고닦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하는 점이다. 개인적인 수행의 정점에 이르면 결국 철학적인 고민, 종교적인 고민, 사회적인 것에 대한 고민을 피할 수 없고, 이러한 고민은 그가 수많은 도장깨기와 무자비한 전투를 통해 이름을 떨친 후에 한동안 시골마을에서 은둔하면서 가지게 된 고민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이 소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깊이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결국 미야모토 무사시는 고수가 된 이후에는 “사람을 죽이는 검”에는 더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나타난다.
이 소설은 고등학교 때부터 재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기회가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번에 리디북스에서 상당히 싼 가격에 판매를 해서 이번에 사서 보게 되었다. 10권짜리 책이라 사실 구입하기가 만만치 않은 책인데, 전자책이라 출퇴근하는 시간에도 읽고, 추석 연휴에 시간이 나서 다 읽었다.
일본 무협지는 처음인데 내가 기존에 읽었던 김용의 '영웅문' 같은 중국 무협지와는 확연히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중국 무협지는 사상적으로 유불도(儒佛道)에 조로아스터교까지 섭렵할 정도로 다채로운 종교적, 사상적, 철학적 스펙트럼을 보여 주지만 '미야모토 무사시'의 경우에는 선불교의 영향이 확연히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 무협지의 경우에는 무술 대결의 묘사가 상당히 길고 자세한데, 미야모토 무사시의 경우에는 대결 장면에 대한 묘사 자체는 허무할 정도로 심플했다. 대신에 전투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아주 자세하다. 사실 권법과 달리 칼싸움은 아주 심플하게 끝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용의 무협지의 경우에는 인물 간의 갈등구조가 복잡하고 다층적인 반면, 미야모토 무사시의 경우에는 비교적 단순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재밌었냐고 묻는다면 "재밌긴 했지만 기대보다는 아니었다"라고 나는 대답할 것 같다. 하지만 일본 무협지는 처음이라 일본의 역사와 사회상을 보게 되는 재미가 신선했다. 서두에 밝혔듯이, 무엇보다 이 소설은 한 명의 무사가 방황하고 성장하고, 완성되어 과정을 그린 책이다. 이 책은 성장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 했다고 하지만 많은 부분이 각색,과장,왜곡 되었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무협지니까... 어쩔수 없는 것 같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