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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Feb 24. 2024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모스크

01 프롤로그 | 슬라맛 인도네시아

코로나가 끝났다고 느낀 건 코로나 확진자 수와 같은 통계나 뉴스가 아니었다. 점점 잦아지는 지인들의 출국 소식으로 코로나가 끝나고 있음을 알았다. 해외로 오가는 사람들이 늘자, 사람들은 종종 '언제 출국하는지' 물어왔다. 그 질문은 마치 내게 돌아가야 하는 곳이라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질문은 방글라데시로 출국, 프로젝트의 근황을 묻는 것일 것이다. 마무리 못한 프로젝트…. 정세 불안, 테러, 난민 사태, 그리고 코로나까지... 몇 차례 계획이 엎어진 경험을 한 터라, 두려움이 뒤섞여 지금 당장 방글라데시로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지금은 프로젝트보다는 충전이 필요했다. 떠나자!

이왕이면 가지 않았던 새로운 곳으로. 새로운 것에 나를 푹 담가버리고 와야지. 어디로 가야 할까?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참여 중인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떠날 계획을 하고 5월 중순부터 한 달간 일정을 비워뒀다. 발리에서 한 달 살기를 할까? 5월이면 인도네시아 우기도 끝나 여행하기에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마음이 뒤숭숭한데, 날씨까지 우중충하면 안 되니까. 몇 해전 주말마다 공부해 온 인도네시아어도 여행지를 정하는 데 한몫을 했다. 비록 시간이 많이 지나서 잊어버린 게 더 많지만, 그래도 아예 까막눈인 것보다 나을 테니까.


떠날 결심을 하자마자 제일 먼저 3차 백신 접종을 마쳤다. (입국을 위해서는 부스터 접종을 하고 접종증명서를 제시해야 했다. 작년 6월, 이 방역수칙은 폐지됐다) 출국을 2주 앞둔 5월 초가 되어서야 항공권을 끊었다. 인천-자카르타 왕복 티켓. 자카르타에서 육로로 자바섬을 횡단하고 발리로 갔다가 다시 자카르타에서 귀국하는 여정으로 세부일정은 현지에서 상황을 보며 정하기로 했다.


드디어 출국.

밤늦게 도착한 첫날과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날을 제외하면 자카르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를 온전히 머무는 날은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자카르타로 다시 돌아올 거라 욕심부리지 않고 숙소에서 나와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여보기로 했다. 위로는 모나스가 있는 독립광장이, 아래로는 그랜드 인도네시아와 플라자 인도네시아 등 초대형 쇼핑몰이 위치하여 센트럴 자카르타에서도 (위치적으로) 중앙에 위치하여 번잡할 거라 생각했지만, 숙소 주변은 생각보다 한적했다.


숙소 맞은편으로 골목길이라고 하기엔 제법 넓은 길에 음식을 파는 수레(까끼 리마)가 줄 지어 있는 게 보였다. 동네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도 제법 오가고 있어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에는 음식을 파는 수레도 많았지만 그 뒤로 식당과 카페, 가게, 주택들이 촘촘히 자리해 있었고 다른 길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에도 빼곡히 주택과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다. 간판을 더듬더듬 읽으며 가게와 좁은 골목길의 벽화, 식물과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놓은 집들을 구경했다. 거리에서 공놀이를 하던 아이들을 제외하고 누구도 우리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보이지 않았지만, 낯선 외국인의 등장에 슬쩍슬쩍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신상미, 이혜령

"슬라맛 빠기(좋은 아침이에요)."

눈이 마주친 주민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자, 수줍게 손을 흔들며 "빠기"라고 대답해 줬다. 첫인사는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 뒤로는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친 사람마다 인사를 건네고 서툰 인니어로 짧은 대화도 나눴다.


숙소로 돌아올 때도 아침에 걸어 나갔던 길로 걸어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에도 떠나기 전까지 골목골목을 훑었다. 아침저녁으로 인사만 수십 번 하며 돌아다녔더니 그새 두 번 세 번 마주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번엔 사람들이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문득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던 방글라데시 생각이 났다. 다음 골목의 친구들이 보이기 전까지 말동무를 해주다가 돌아가던 꼬맹이들과 매일 가족 안부까지 챙기던 채소가게 아저씨, 시위 소식이나 안전 이슈를 전해주던 이웃들, 모두 잘 지내고 있을까?


때마침 정오 기도를 알리던 '아잔' 소리가 모스짓(이슬람 사원)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이것도 방글라데시를 추억하게 하는 소리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아잔소리 배경으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신성한 아잔과 함께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그대로 방송된 것이다. 우리는 큰일이 난 것처럼 놀랐지만, 마치 일상인 듯 그 거리에서 우리를 제외하곤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스짓 입구에 아이들이 벗어놓은 신발이 가득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기도만을 위해 모스짓을 찾지 않았다. 모스짓은 마을 주민들에게는 사랑방, 아이들에게는 공부방이자 문화센터, 놀이방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모스짓 밖을 나와 거리까지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잔소리를 알리는 스피커를 통해 거리 곳곳에 아잔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코로나로 몸과 마음이 갇혀있던 동안, 내가 그리워했던 게 이런 거였나, 싶었다. 기나긴 코로나로 인해 마음의 병 한번 거쳐가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나 역시 유독 힘든 시기가 있었다. 사람들이 힘들어 만남들을 피하게 됐고, 일도 사람 만나는 일은 기피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점점 더 깊은 동굴로 들어가 버려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결정한 여행이었다. 도피일 수도 있고 마음을 살필 시간이 필요했다.


왜 ‘인도네시아’냐고 물었지만, 사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발리를 빼면 인도네시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완전히 새롭지도 않았지만, 익숙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직항 비행기, 몇 해 전 공부한 인니어와 그 과정에서 배운 얄팍한 지식, 커피 원산지… 그냥 떠나기 위해 적당한 이유와 핑계를 만들었을 뿐이다. 마음을 살피기 위해 인도네시아까지 날아갈 필요까지 있었을까? 떠나기 전에는 그 어떤 확신도 없었지만, 그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떠나오길 잘했다고, 인도네시아로 오길 잘한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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