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사례를 각색하여 서술하였습니다. >
영업직인 F과장(30대 초반 남성)은 무척이나 우직한 성격이었다.
맡은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했고, 상사가 시킨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해내려고 노력했다.
회사가 나날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고, 거기서 더 동력을 받아 주말도 휴일도 스스로 반납해서 일하는 충직한 직원이었다.
일만 하느라 여자친구에게 소홀했다며 배시시 웃는 표정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도 묻어나왔다.
F과장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회사에는 착실한 직원들이 원래 많이 있었다.
회사는 각종 수입품들을 도매처나 업장에 납품하는 영세한 회사로, 처음에 작게 시작했지만 열심히 일해주는 직원들 덕분에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뜻이 맞는 영업직 직원들이, 현장을 구르며 돈독해진 남자들 특유의 의리와, 미래를 향한 비전으로 똘똘 뭉쳐온 덕분에 순조롭게 커왔던 것이다.
직원들과는 달리, F과장의 상사인 OO지점(팀) B팀장(40대 남성)은 그다지 착실한 사람은 아니었다.
늘 능글맞은 웃음에, 여유로운 척 꾸미는 허세를 장착하고, 비싸지도 않고 싸구려도 아닌 적당한 명품을 걸치는 게 마치 영화 속 건달 같은 모습이었다.
짧은 머리는 매일 포마드를 발라 고슴도치마냥 빳빳하게 세웠고,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은 어딘가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인상을 주었다.
B팀장은 본인은 설렁설렁 일하면서, 팀원들을 쪼아대고 높은 실적을 강요하는 부류의 상사였다.
"밑에 애들을 시키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며, 팀원들에게 전혀 미안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팀원들이 각자 거래처를 돌아다니는 동안, B팀장은 본인의 상사인 본사 전무, 상무를 찾아가 의전하고 수발 들기를 즐겼다.
한편으로 B팀장은, 속칭 "마이크로매니징"을 하는 피곤한 상사였다.
직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려고 했고, 불시에 팀원들에게 연락을 해서 어디서 누굴 만나는지 일일이 체크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영업직 직원들은 B팀장의 밑에서 얼마 버티지 못했다.
회사 영업팀은 각 팀(지점)마다 소수의 영업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영업직 직원들은 2~3년마다 각 팀을 돌아다니며 업무를 돕는 구조였다.
그런데 B팀장의 팀을 거쳤던 직원들은 배치된지 몇 개월 채 지나지 않아서 이런저런 핑계로 금새 다른 팀으로 가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회사로 떠나버렸다.
어쨌든 B팀장의 팀 자체의 실적은 나쁘지 않았고, 아무도 B팀장의 리더십에 문제를 삼지도 않았다.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퇴근 후 소주 한 잔으로 답답함을 풀었고, B팀장이 없는 자리에서 그를 시원하게 씹어댔으며, 그렇게 뒤끝없이 해소하는 게 남자다운 거라고 넘겼다.
하지만 F과장은 여느직원들과는 달랐다.
F과장은 동료들과의 술자리만으로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B팀장이 버거웠고, 어딘가 얹힌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잘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지 알아주지 않는 B팀장이 원망스러웠다.
다른 직원들처럼 OO지점을 떠나지도 않으면서, F과장은 언젠가는 자기의 노력과 실적을 B팀장도 회사도 다 알아줄 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F과장의 기대는,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매년 실시되는 인사평가에서, B팀장은 F과장에게 최하위고과를 주었다.
이를 전혀 납득할 수 없었던 F과장이 항의하였으나, B팀장은 나름대로 F과장이 부족했다고 느낀 점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유류비 영수증을 제대로 구비하지 않았다거나(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거래처와 불화가 있었다거나(거래처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던 건이었다), 올해 실적이 나쁘다는 등(코로나로 인해 전체적으로 전년도보다 경기가 침체되었던 탓도 있었다).
F과장은 B팀장이 제시하는 이유들을 수용하기 어려웠고, 너무도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회사에 직장 내 괴롭힘 신고까지 하게 되었다.
B팀장의 전횡은 너무 명백해서, 영업직 직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B팀장의 불합리함을 성토했다.
F과장이 제기하는 문제들과 그대로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직원들과는 달리, 본사 임원들은 B팀장을 징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라고 두둔했다.
오히려 F과장이 너무 사람이 여리고 약하며, 상사를 꼰지르는 게 남자답지 못하다고도 지적했다.
어떻게든 서로 잘 지내보려는 노력도 없이 골치 아프게 일을 키웠다며 한심하게 여겼다.
결국 B팀장에 대해서는, 여러 직원들의 피해사실을 종합하여 중한 수준의 징계가 내려졌다. 법과 사규에 따른 정당한 조치였다.
하지만 그 피해사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본사 임원들이 보인 태도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이만큼이나마 회사가 커올 수 있었던 건, 회사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F과장과 같이 묵묵하게 일해온 직원들 덕분이었다.
그 고마움을 전혀 갖지 않고, 직원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며 도리어 핀잔을 주는 건, 제3자인 내가 보기에도 분노가 일어날만 했다.
이런 식으로 F과장을 부당하게 대한다면, 앞으로는 대체 누가 회사를 위해서 헌신할 것인가.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는 교훈을 몸소 보여주는 회사인데 말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는, 힘 좋고 충성스러우며 농장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앞장서서 일하는 말 "복서"가 등장한다.
그런 복서의 최후는, 죽는 날까지 끝끝내 희생만 하다가 버려지는 것이었다.
일하는 와중에 쓰러진 복서는, 치료를 하러 병원으로 간다는 거짓말에 속아 헐값에 팔려 도축장으로 가게 된다.
물론 내가 좋아서, 행복해서 회사 일에 열정을 다 바칠 수도 있다.
그게 나를 고양시키고, 동기부여를 해줄 때도 있다.
하지만 섣불리 기대하지는 말자.
회사가, 상사가 내 노력을 알아주리라고.
언젠가는 다 알아서 치하하고 보상해주리라고.
소설 속의 복서와 더불어, F과장의 사례 역시 충분히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