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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돌 Oct 28. 2024

에피소드1. 착하게 길들여진 사람

< 실제 사실을 각색하여 서술하였습니다. >


얼마 전 X회사에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접수되었다.

그 사건의 조사 업무를 맡게 되어,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당했다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

17년간 인사팀에서 일해왔다는 피해자 A부장.

도대체 어떤 일을 겪으신 건지 묻자, A부장은 본인이 겪은 사건들을 하나씩 덤덤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가해자는 법무팀에 새로 영입된 경력직원 B상무였다.

B상무는 입사 초부터 A부장과 트러블이 생겼다.

A부장이 B상무에게 입사 처리를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제출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묵묵부답이었고, 이에 A부장이 리마인더 연락을 드리자 "에이, 사람 귀찮게 하네.", "그거 이미 다 제출한 건데?"(B상무의 착각이었고, 제출하지 않았음)라고 짜증과 반말이 돌아왔다.

A부장도 사람인지라, 이런 B상무의 태도가 불쾌했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만 해도, A부장은 B상무가 아직 처음이라 적응이 필요해서 그렇다고, 이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A부장의 생각은 현실과 달랐다. (처음에 느낀 불길한 직감이 맞았다고 해야 하나.)

B상무는 입사 직후부터 A부장에게, 마치 본인의 비서처럼 사사건건 사소한 일을 시켰다.

회의실을 잡아달라, 이런저런 문서를 찾아서 메일로 보내달라는 등 본인이 직접 해야하거나 할 수 있는 일들을 A부장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B상무는 A상무가 인사팀 소속이라는 이유로 무리한 요구들까지 하였다.

회사 규정에도 없는 재택근무를 무작정 승인해 달라고 하거나, 본인 혼자서 쓰는 사무실을 따로 제공해 달라고 무턱대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A부장은 이런 B상무의 지시나 요구들을 때로는 그냥 아무 불평불만 없이 도와주고, 때로는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어쨌든 B상무는 변함없이, A부장에게 적정한 권한 범위를 넘는 업무 지시나 A부장이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계속하였다.

거듭되는 하대와 반말, 짜증 섞이고 비아냥 대는 말투는 여전하였다. (욕설만 안할 뿐이었다.)


A부장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B상무의 비위를 맞춰주고 얘기를 잘 들어주다 보면, 언젠가는 B상무도 A부장의 입장을 헤아려 줄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외부에서 영입한 B상무가 회사에 잘 적응해서, 좋은 업무성과를 낸다면 A부장으로서는 인사팀으로서 회사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다.

B상무와 인간적으로 친하지 않아서, 더 친해지면 B상무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따로 식사를 하거나 안부 연락을 하면서 B상무에게 먼저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B상무는, A부장을 단 한번도 존중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A부장을 무시하고 하인마냥 부려먹었다.

A부장이 회사에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하게 되는 그 날까지 말이다.




여기까지 말하면서, A부장은 B상무와 통화한 녹음파일을 들려주었다.

A부장이 B상무의 부당한 폭언을 참다 못해, 며칠동안 분을 삭히다가 B상무에게 연락을 해서 그 때 하신 말씀이 너무 상처가 되었다고 말하려고 한 통화였다.

- A부장: "저, 잠시 통화 가능하세요?"

- B상무: "왜 전화했는데? 용건만 말해, 용건만"

- A부장: "아, 혹시 통화가 어려우시면 다음에 시간이 있을 때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 B상무: (갑자기 고성을 지르며) "아니, 용건을 말하라고! 용건! 답답하게 구네."

- A부장: "지난 번에 저에게 하신 말씀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 B상무: "무슨 말? 나야말로 A부장 때문에 할 말이 많은 사람이야!"

- A부장: "지난 번에..."(계속 말하려고 하는데 B상무가 끼어든다.)

- B상무: "그런 얘기는 만나서 해요, 얼굴보고 하자고. 바쁘니까 끊습니다."

녹음파일을 귀 기울여 듣다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A부장을 바라보자, A부장은 한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고서 굵은 눈물방울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은 매번 이렇게 힘들고 억울한 일들에 대한 회상과, 한숨과 눈물로 뒤섞인다.

그럴 때마다 곱씹어본다. 피해자의 눈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A부장은 직원들을 위해 항상 "서비스 마인드"로 살아왔다고 했다.

직원들에게 늘 친절하게 대하고, 직원들의 어려운 점을 경청하고 해결해 주려고 애쓰는 조력자.

그런 장점 덕분에, A부장은 17년이나 인사팀에서 경력을 쌓고 부장이라는 높은 지위까지 승진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같은 조직의 보상은 A부장의 그러한 인사팀 구성원으로서의 친절하고 따뜻한 행동을 강화시켜준 데에서 더 나아가, A부장이라는 개인의 "삶의 형태"까지 결정해 버린 것 아닐까.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친근하게 대하고 남을 도와주기 위한 낮은 자세로 임하면서 살면 된다는 관념 - 그 고정관념이 17년이라는 기간동안 지나치게 학습되고 체화된 것이 아닐까.

원래의 성격이나 가치관에 더해서, 실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삶의 현장 속에서 생생하고 반복적으로 말이다.


A부장이 B상무에게 이렇게 당하기만 한 것은, A부장이 바보라서가 아니었다.

A부장도 다른 데서는 자기 의견을 똑부러지게 말할 줄 아는 당찬 성격으로 보였다.

그런 A부장이 회사 안에서 꾹 참고 또 참는 인내심의 화신이 된 건, 회사에 의해서 둥글둥글한 사람으로 길드여진 탓이 아닐까 싶다.

화나는 상황을 견디고, 갈등을 최대한 피하고, 상냥하게 대하는 것이 일종의 회사 내에서의 생존전략, 우월전략이 되어 버린 것이다.

A는 그렇게 좋게 좋게 유야무야 문제를 지나가는 게 현명하다고 믿고 살아온 것이다.


A부장이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A부장은 부당한 일을 겪은 피해자다.

A부장의 말이 전부 다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십수년 간 회사생활 끝에 남겨진 A부장의 진면모이다.

착하게, 더 착하게 살도록 만들어진 사람.

결국 A부장이 흘린 눈물의 속뜻은, B상무를 향한 미움과 원망이 아니라, 실은 그렇게 부당한 상황 속에서도 늘 저자세로 숙이고 참아온 자신을 향한 자책과 설움이 아니었을까.


나 역시도 회사생활을 할 때마다 늘 느꼈던 점이다.

회사는 사람을 순응하게 한다. 둥글둥글한 사람을 원한다는 말로, 싸가지를 운운하며, 사람을 나약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히 회사원도 아니고, 회사 바깥의 인간관계도 형성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회사에서 받는 무언의 압력과, 회사라는 테두리 속에서 너무 갇혀버린 건 아닐까.




회사보다도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다.

누가 나의 존엄을 짓밟을 때에는, 그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오로지 나 자신이 나를 지켜야 한다.

흥분하며 싸울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 나에게 부당한 언행을 가할 때에는 단호하게 그것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높은 사람에게도 쫄지말고, 용기를 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오히려 보호받고 존중받는 것을 많이 보았다.


착하고 선량한 A부장의 눈물 속에서,

A부장을 위로하고 안타까워 하는 마음과 더불어,

순종적인 조직원의 마인드에서 깨어나서,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힘과 의지가 필요함을 다시금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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