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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다인 Jun 11. 2021

모든 것은 번아웃으로 시작되었다.(1/2)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하얗게 불태운 나날들

 “전형적인 공황장애 증상입니다. 그것도 중증이에요.
우울증도 심하고요. 현재 상태로는 장기간의 치료가 필요해 보입니다.”      


  따스한 어느 봄날. 나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진단받았다. 두 가지 모두 심각한 것으로 진단되었다. 실제로 나는 삶에서 열정이 사라진 상태였다. 어떤 것을 해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입맛이 없어 자주 끼니를 걸렀고, 앙상하게 마른 몸에는 언제나 힘이 없었다. 가끔 침을 삼키면 목구멍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느껴지곤 했다. 가슴이 답답해 자주 한숨을 쉬었다. 때로는 이유 없이 눈물이 나거나 심한 공포감으로 몸을 떨었다.      


  나란 사람은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풀어낼 방법이 없어 보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였다.


  모든 것은 번아웃으로 시작되었다. 대부분 번아웃(Burnout) 증후군에 대해 잘 알 것 같다. 나 역시 이 단어를 뉴스나 인터넷에서 본 적 있다. 어느 시점부터 느껴온 무기력, 의욕 상실은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인 듯했다. 직업과 관계없이 과도한 업무를 하다 보면 누구나 심신이 고갈된 상태가 된다. 경중에 따라 증상도 다양하다. 가볍게는 수면 부족, 몸살, 감기 증상이 나타나는데, 심한 경우 만성 피로, 불안증, 공황장애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 경우는 후자였다.


 ‘일을 얼마나 했길래 공황장애까지?’


  일을 많이 한다고 다 공황장애가 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일을 하는 사람에 따라서 느끼게 다르다. 과로한다고 모두 나처럼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질문을 조금 바꿔보면 좋겠다. ‘어떻게 살면 그렇게 될 수 있나?’라고. 과로의 정도로 번아웃을 판단하더라도 그 정도가 심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아도 고도의 힘들어 보인다고 할 만큼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는 시간이 몇 년 동안 이어졌다.     



 잠시 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나는 27살까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몰라 고민이 많았던 청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디자인과를 선택했다. 어렵게 명문대에 합격했지만, 디자인보다 영화와 미학, 예술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본격적으로 미학 공부를 하고 싶어 독일 유학을 준비한 적도 있다. 결과적으로 잘 안 됐다. 열정 페이, 높은 대학 등록금, 아버지 사업의 실패. 당시 나는 여러 가지로 좌절해 있었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바늘구멍 같은 취업 문을 뚫고 들어가 자기 몫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돈 때문에 회사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요? 과장님이요? 누가 봐도 그냥 커리어 우먼인데.”


가끔 내 과거사를 얘기하면 동료들이 이렇게 되묻곤 했다. 그렇다. 돈 때문에 회사원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결국 회사원이 되었다. 조금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친구들은 사원 2~3년 차가 돼 있던 시점이었다. 졸업 후 독일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안정적인 돈벌이가 없는 상황에선 뭐든 쉽지 않았다. 결국 유학이 좌절되고 얼마간 방황을 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엄마는 고향에서 미술학원을 차려볼 것을 권했다.      


 당장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던 나는 엄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재밌기도 했지만, 언제까지나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고민 끝에 대학 때 재밌게 했던 프로젝트를 떠올렸고, 관련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력도 없이 당장 입사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전문성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원에 들어갔다. 직장에 다니면서 대학원 공부를 하겠다는 나를 엄마는 반대했다. 하지만 무리해서라도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취업을 위해 공부하고, 공부하기 위해 취업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나의 직장생활은 시작되었다.      


서울살이는 무엇을 하든 돈이 들었다. 엄마가 월세 보증금과 초기 정착금을 지원해주셨지만, 대학원 등록금을 내고 나니 얼마 안 가서 돈이 바닥나버렸다. 사회 초년생의 연봉으로 월세와 생활비, 매 학기마다 700만 원을 훌쩍 넘는 등록금을 충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아도 학자금 대출에서 벗어나긴 어려웠다. ‘대학교 학자금 대출을 갚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 학자금 대출이네. 열심히 해서 더 많이 버는 회사로 가야겠다.’ 일찌감치 대기업에 들어가 자리 잡은 친구들은 해외여행을 다니고, 명품가방을 사거나 SNS에 웨딩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나는 참 갈길이 멀다 싶었다. 할 일은 많고,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만큼 마음은 점점 조급해져 갔다.      


  늘 그렇듯, 빨리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강박과 조급함으로 삶을 물들였다. 그 당시 나를 움직였던 동력은 열정보다는 열등감에 가까웠다. 그 동력으로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대학원 수업을 들었다. 주말에는 대학원 과제를 했고, 대학원 수업이 없는 날엔 다른 실무 강의를 듣거나 영어학원에 다녔다. 디자이너라는 직업 특성상 늦은 시간까지 야근하는 날이 많았다. 11시가 다 되어 자취방으로 귀가하면 그제야 대학원 과제를 시작했다. 당시 수강했던 전공 수업들은 실제로 밖을 돌아다니며 리서치를 하고 시간과 공을 들여 정리해야 하는 과제가 많았다. 밤새 과제를 하다 보면 출근 기상 알람이 울렸다. 그렇게 한숨도 자지 않은 상태로 곧바로 샤워하고 출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일과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보니 늘 시간에 쫓겼다. 회사에서 오후 5시 반까지 주어진 일을 끝내야 했기에 점심은 빵으로 때우거나 거르기 일쑤였다. 팀장님께 메일을 보내고 도망치듯 회사를 뛰쳐나와 전철역으로 달려갔다. 전철에 몸을 싣고 나면 매주 읽어가야 하는 논문들을 읽기 시작했다. 대학원 수업이 끝나면 동기들과 카페에서 틈틈이 공모전 준비를 하거나 학회에 논문을 썼다. 카페 영업시간이 다 되어 미처 끝내지 못한 과제를 접고 집으로 오면 자취방의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쁘고 열심히 산 데에는 비싼 대학원 등록금도 한몫했다. 피곤하고 힘들어도 등록금을 생각하면 쉴 수가 없었다. 대학원은 애초에 '가성비'의 영역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최대한 시간을 쪼개어 강의를 들었다. 타 전공 수업을 청강하고 이미 들었던 수업도 교수님이 바뀌면 또 듣곤 했다. 청강 수업이라 해도 빠짐없이 출석하고 팀 과제와 소논문을 제출했다. 한 번은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교수님이 물어보셨다. “○○씨는 청강인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하죠?” "교수님이 열심히 안 할 거면 청강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땐 그렇게 툭 던지며 웃었지만, 차마 등록금이 아까워서라고 할 수가 없었다.      


 나름 저축한다고 했지만 월세를 내고 나면 언제나 돈이 부족했다. 웹진에 기사를 쓰고 원고료를 받거나, 책 표지 디자인을 해서 용돈을 벌었다. 그렇게 해도 항상 돈이 부족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시간과 체력을 최대치로 쓰고 있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듯 돈이 모이지 않았다. 조금씩 오기가 생겼다. ‘돈을 벌려면 능력을 더 키워야 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지금처럼 해선 어림도 없겠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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