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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다인 Jun 23. 2021

통증의 이유

몸과 마음의 위기경보

저녁 10시 44분. 사무실 한편이 어두워졌다. 옆 부서는 모두 퇴근을 한 모양이었다.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내 책상 앞에서 멈췄다.


  “아이고, 김 과장. 아직도 안 갔어?”

  “어, 상무님. 이제 퇴근하세요?”

  “응. 할 게 좀 있어서. 김 과장은 뭘 한다고 여태 남아 있어? 얼른 퇴근해야지.”

  “네. 보고서가 아직 안 끝나서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김 과장도 대충하고 들어가.”     


  퇴근하는 상사와 잠깐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명치 끝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진다. 위경련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지만, 끝나지 않은 일을 두고 퇴근할 수는 없었다. 불이 꺼진 회의실에 들어가 의자 몇 개를 붙여 누웠다. 장시간의 노동으로 화가 난 몸을 복식 호흡으로 다스려 볼 작정이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다 보니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집에 가고 싶다. 그래도 해놓고 가는 게 마음은 편하니까…. 메일만 보내고 가자.’


의자에 누운 채 주먹으로 배를 툭툭 치다 일어났다. 잠시 누웠다 일어났을 뿐인데 11시가 지나버렸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통증을 참는 것은 당연하고, 일을 끝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다. 일에 대한 책임감은 언제나 통증보다 우위에 있었다. 업무량과 마감일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통증을 통제하기로 한다. 가방에서 진통제를 꺼내 입안에 털어 넣고 최면을 걸어본다.


‘조금만 더 버티자. 조금만 더.’


이미 몇 시간 전에 진통제를 먹은 상태였지만 약효가 다한 것 같았다. 업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통증은 억제되어야 했다. 진통제의 효능이 다하기 전에 업무를 빨리 마무리 짓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내겐 없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방법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느 날 내 이야기를 듣던 심리상담 선생님은 말했다.


  “어떤 면에서는 참 섬세한 사람 같은데, 어떤 면에서는 또 둔감한 면이 있는 거 같아요. 특히 본인한테 쉼이 필요하다던가…. 힘든 것을 본인이 잘 못 느껴서 계속 참고 일을 하나 싶기도 하고요.”


그녀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원래 내가 아픔에 둔했던가?’



  나는 통증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은 나만큼 민감하지도, 통증을 자주 느끼지도 않았다. 어릴 때부터 복통과 편두통을 자주 호소했지만, 특별히 문제가 발견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차츰 내가 남들보다 예민한 신경계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레인 아론 박사가 말한대로 나는 ‘초민감자’였던 것이다. 나는 때때로 경미한 소리, 냄새, 진동 등에 매우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는 각종 통증으로 이어졌다. 진통제를 먹고 통증을 견디는 일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픈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픔의 대상이 본인이든 타인이든, 아픔의 본질은 ‘피하고 싶은 고통’이다. 아프다고 직장에서 병가를 자주 내면 “건강관리도 실력이야.”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일보단 아픔의 치유를 선택한 대가로 책임감 없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타고난’ 민감성을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예민한 사람은 사절’ 같은 문구처럼, 세상은 누군가의 민감성을 품어주는 데 인색하다. 이런 이유로 통증을 숨기고 견디는 것은 때론 누군가에게 현명한 선택이 되곤 한다.      


  참는 것이 익숙해지면 큰 고통에도 표정 관리를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여러 가지 통증들이 수시로 오는 경우라면 일일이 대응하기도 어렵다. 협업하는 상황이라면 “그거 언제쯤 줄 수 있어요? 빨리 줘야 하는데.”라는 재촉이 이어지기 쉽다. 언제나 빡빡하게 업무가 돌아가는 상황에서 ‘쉬엄쉬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연스레 어지간한 통증에는 대응하지 않는 태도가 몸에 밴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대신에, “아 죄송해요,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통증을 참는 것이 몸에 배면 ‘쉰다’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건너뛰게 된다. 여기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라는 강박과 집착이 더해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건강보다 다른 것을 우선하는 습관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뇌로부터 더 큰 신호를 받게 된다.


‘자꾸 내 말 안 들을 거야? 이래도? 그럼 이건 어때?’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직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했다. 어딘가의 통증이 심해졌다면 직관을 따라야 했다.


 모든 통증에는 이유가 있다. 통증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겠다는 몸의 신호다. 신호는 위장, 대장의 경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견디기 힘든 슬픔이나 공황 발작으로 오기도 한다. 클라우스 베른하르트는 그의 저서<어느 날 갑자기 공황이 찾아왔다>에서 우리의 잠재의식을 슈퍼컴퓨터에 비유했다.

“잠재의식은 슈퍼컴퓨터처럼 직관을 통해 우리가 처해있는 현 상태를 분석한 자료를 지속적으로 보내준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그만두는 게 더 나은지 충고해준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바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싫어!’라고 외치는 짧고 강렬한 외침.

그 외침을 들어보자.

똑똑한 직관이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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