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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Oct 30. 2023

상상력이 삶을 결정한다

상상력(1)


 어릴 적 과학 상상화 그리기 대회에서 입상 깨나 해 본 경험으로,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려야 먹히는지 알고 있었다. 배경은 우주나 바다 속이어야 했고, 돔으로 된 주거, 상업 지역 사이에 튜브로된 통로가 놓여지고, 각종 탈것들이 지나가는 장면들이 연출되어야 했다. 자연과 어우러져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등장하면 과학적 유토피아를 보여주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간혹 이런 부류에서 벗어난 그림들이 입상을 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인 패턴과 결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42년째 우주세계만 그리는 과학의 달 행사' _ 오마이 뉴스 

 같은 이미지들의 반복이 지적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 어린 나이었지만 의구심과 반항심이 들었다. 한번은 목가적 풍경의 시골의 모습을 과학 상상화 그림으로 제출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의아한 표정에서 모종의 통쾌함을 느낀적이 있었다. 과학이 지향해야할 바는 우리의 터전을 보전 하는 데 있지,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데 있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기특한 생각이었지만, 내 그림은 입상 하지 못했다.


 소위 먹히는 '상상력'이라는게 있었다. 흔히 상상력이 자발적으로 발동되는 것이라 이해하지만, 상상은 학습되는 것이었다. 상상력의 이러한 학습 경향에 깊은 통찰을 주는 한 시인이 있어 인용하고자 한다. 



상상력은 문화적 콤플렉스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상상력의 학습 경향을 문화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문화 콤플렉스의 원인은 자신이 속한 문화에 의한 연상 작용이라는 것이다. 손쉬운 연상에 의해 나오는 이미지들에서 자신은 "세상의 광경들로부터 길어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어두운 영혼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미지들일 뿐"이다.


 그것은 주로 교육에 의해 이루어진, 굳어져 있는 이미지들의 모듈들이다. 우리 "스스로는 객관적인 교양을 쌓아 간다고 믿으면서, 문화 콤플렉스들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학교 교육이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이 시기에 받는 문화적 충격은 평생 동안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 시기의 학교생활은 곧 문화와 동의어이고, 이 때의 문화 충격은 상상력 활동에 결정적이다. 


 "좋은 면에서 보면 문화 콤플렉스는 전통을 되살리고, 다시 젊게 만든다. 나쁜 면으로 보면 문화 콤플렉스는 상상력이 결핍된 작가의 교과서적 습관이다."


 이처럼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문화 보편적인 상상력을 내재화한다. 이를 통해 문화적 동질성을 확보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속한 문화 너머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고 만다. 마치 정주민이 유목민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것 처럼.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그동안 이미지는 무의식의 지배 하여 놓여있었다고 생각되어 왔지만,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무의식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슐라르의 혁명적 관점 전환을 지켜볼 수 있다. 

 

 "우리는 오히려 순수한 해방, 절대적 승화라는 시적 현상 앞에 있는 것이다. 이미지는 더 이상 사물의 재배 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의식의 충동 하에 있는것도 아니다."


 우리는 


 나는 충돌하는 아포리즘에서 흥미를 느끼는데, 니체와 셰익스피어의 격언에서 상상과 실제에 대한 견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니체는 "실제의 세상은 상상의 세상보다 훨씬 작다."라고 하였지만,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천지간에는 자네(호레이쇼)의 철학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이 있다"고 하였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증명할 길은 없다. 우리는 세상을 다 알지 못하고, 상상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와 상상의 사이


 한편, 상상력은 다른 맥락으로 읽히기도 한다. 여기서 상상력은 보편적 상상력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발상에서 기인한다. 이때 상상력은 주관적 심상에 의해 저마다 정의되곤 한다. 하지만 공통된 견해는 "세상에 없던 것을 그려내는 능력" 쯤으로 이해 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몽상

 무의식의 지대한 영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이 모든 것을 결정하다는 말도 맞지 않다. 


또한 의식의 합리적 이성만이 정답은 아니다. 합리성이라는 이름 하에 벌어진 역사의 잔행들이 이를 대변한다. 바슐라르는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 지대로서 몽상Day dream을 이야기 한다. 


지금껏 몽상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합리적이지 않아 쓸모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몽상은 수면 상태로의 퇴행도 아니며, 그렇다고 명료한 의식의 발로도 아니다. 오히려 몽상의 주체는  생각하는 자아(Cogito)이다. 지금껏 몽상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합리적이지 않아 쓸모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달라진 상상력 수용 방식, 이미지 소비자


 한편,  미디어의 발달로 다양한 버젼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들이 우리의 상상계를 전염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전보다 다양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게 되었지만, 수용의 관점에서는 그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전 전통사회에서 우리가이미지 학습자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 소비자로 둔갑한다.학습과 소비, 둘의 미세한 차이를 열거하자면 지면을 다 할애해도 모자라겠지만, 공통점은 모두 능동이 결여 되어있다는 데 있다. 


"소비의 주체는 우리 개인이 아니라 기호의 질서이다."


 보들리야르는 이러한 소비에 대해, "소비의 주체는 우리 개인이 아니라 기호의 질서"라고 말한바 있다. 다시 말해, 주체적 소비는 거짓이며, 현대인은 이미 구조화된 기호의 질서 속에 흡수되어 능동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한편, 이미지 생산자 역시 거대한 기호의 질서 속에서 상품 논리에 따라 이미지들을 양산한다. 창조성이 결여된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동일한 것을 재생산해내며, 소비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하는데 일조한다.


 앞서, 문화적으로 구축된 상상력에서 벗어난 몽상이 상상력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하였지만, 소비 사회에서 몽상은 대게 상품 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 사람들은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퍼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퍼"



 바슐라르가 지적했듯이 상상력의 학습이란 것은 문화적 관습을 유지하고 문화 구성원간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상상력이 관습적으로 고착화되면 마치 '정답'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이 때 정답에서 벗어난 상상력은 문화가 그어놓은 선에 저항 받기 마련이다. 


 영화 타짜에 나온 대사,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퍼." 는 영화적 맥락으로 따져보더라도, 협박으로 읽힌다. 정답이 있는데 왜 저항하여 삶을 피곤하게 하느냐는 일종의 문화적 협박인 셈이다. 분명 쉽게 살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관습대로 살아가면 무난한 삶을 살 수 있다. 저항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착실한 학생으로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토끼같은 자식을 낳아 훌륭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시켜 보람을 얻으며, 빚지지 않은 노년을 보내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삶이라는 꿈꾸며, 그러한 이상을 공유한다. 또한 이에 부합하는 인생을 우리는 순탄한 인생이라고 표현한다. 


 상상력-이미지는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며, 문화적으로 생산된 상像을 좇도록 


 이처럼 문화적으로 주어진 상像의 테두리 안에서만 미래를 상상할 수 있으며, 그 너머의 상을 전개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 또는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다. 또한 그 틀을 깨는 상상력은 인정 받지 못하며 때로는 극심한 저항을 받게 된다. 


개인 미디어의 등장과 달라진 소비의 위상


 보들리야르는 대중 매체 시대의 기호-소비 문화를 다루었지만, 오늘날 개인-소셜 미디어의 등장으로 소비의 양상이 달라졌다. 여전히 기호 질서는 작동 하고 있지만, 작은 균열을 내는 흐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 매체와 개인-소셜 미디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생산과 소비의 일방향성이 양방향으로 전환되었다는데 있다. 따라서 개인은 이미지 소비자인 동시에 이미지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부추김 받는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상상력의 생산에 있어 큰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이전과 비교했을 때 이미지의 생산자가 되기위한 문턱이 낮아졌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생각, 표현들을 웹을 통해 전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전시의 형태가 최근에는 상품 논리와 결합하여 소위 돈이 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인들은 기존에 구축된 이미지들을 모방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삶을 과시하거나 행복한 모습을 보여줌으로 실제의 삶을 포장하거나 만들어진 미디어 정체성을 통해 위안을 삼으려는 경우가 그러하다. 비슷한 패턴의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노출시키며 관심사, 가치관, 라이프 스타일 등을 전시하는 과정에서 학습된 이미지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이미지의 능동적인 생산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자기 복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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