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형성
* 본문은 2018년 수유너머 세미나에 기고된 글입니다 .
(1)
"나의 실험 TV 가 / 항상 재미있지는 않다. / 그렇다고 / 항상 재미없는 것도 아니다. //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 단지 변하기 때문이듯이,"
"자연의 아름다움의 핵심은 그 무한한 양QUANTITY이 질QUALITY이라는 범주를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 입니다. 여기서 '질'의 개념은 가치가 아닌 특성, 범례를 의미합니다. 즉 "A는 B와 다르"지만, "A가 B보다 우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분별을 통해 의식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의식의 차이에서 위계가 형성됩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관념 역시 이러한 위계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예술은 걸작(Master Piece)이라 불리지만, 어떤 예술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가치-매김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에서 벤야민이 예견한 아우라의 상실은 예술의 위계 구분의 무의미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진의 등장으로 회화는 더이상 재현의 우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원본이라는 위상-마저도 자랑할 수 없게 됩니다. 작품이 갖는 숭고한 기운-아우라의 상실은 이같이, 양이 질을 압도할 때 발생합니다.
(2)))
"나의 실험TV는 '완전범죄'를 가능하게 한 최초의 예술(?) 형식이다 .... "
"나의 TV가 내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단지 "물리적 음악"일 뿐이라는 것을."
앞서 백남준은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변화가 바로 아름다움의 핵심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예술계 나아가 사회 일반에서는 무엇이 예술인지를 판단하는 기준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개성을 드러낸 것이다.' 라는 생각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종종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동일시 합니다. 하지만, 백남준은 자신의 TV예술은 단지 '물리적 음악'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백남준은 작품에서 자신을 지워버립니다.(아니, 오히려 지워짐 당한 것입니다.) 작품은 단지, 전자의 가변적인 흐름, 즉 자연의 변화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변화는 매체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통 회화 작품에서는 물질의 변화는 매우 천천히 일어나는 것 처럼 관찰됩니다.(거의 지각 되지 못할 정도로) 그러므로, 우리는 회화나 조각에서 예술가의 손길(붓 터치, 흔적)을 느끼고, 회화의 물질성에서 작가의 정신을 연상합니다. 하지만, TV는 초 단위로 이하로 물질의 변화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매체의 물질성 그 자체가 더 잘 관찰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술을 감상해오던 기존의 방식으로, 백남준의 예술을 접하고는, 그곳에서 백남준의 개성(정신)을 발견하려 노력합니다. 어쩌면, 백남준이 말한 '완전범죄' 예술로서의 '물리적 음악'은 작가의 흔적(혹은 의도)을 관찰 할 수 없는 작품에서조차, 여전히 작품이 작가에게 귀속되었다 착각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완벽 범죄라 말한 건 아닐까요?
"나의 TV는 예술 이상(?)이거나 / 또는 / 예술 이하(?)이다. / 나는 내 개성보다 / 더 뛰어나게(?) / 또는 / 더 못하게(?) 거짓말을 하는 / 어떠한 것도 작곡할compose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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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NST IST DIE ERSCHENINUNG DER IDEE." - "예술은 이데아의 출현이다." (헤겔-실러)
"'아이디어/이데아'의 이러한 '현대적'(?) 활용은 플라톤-헤겔이 이데아라는 고전적인 어휘에 부여했던 '진리', '영원', '완성', '이상적인 이데아'의 의미와는 별 관련이 없다."
"동시대 예술에서는 "아이디어의 물신주의Feticism of Idea"가 결정적인 척도인 것 같기 때문이다."
앞서, 백남준의 예술이 작가의 정신(개성) 혹은 이상을 드러내는 예술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설명을 덧붙이자면, 보통(?)의 예술에서, 작가들은 "완성된 작품에 대한 대략적인 얼개를 머릿속에 그려보고 ... 이상적인 '이데아'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백남준의 실험TV 에서는 그러한 방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집니다. 쉬지않고 변하는 전자들의 흐름을 일률적으로 조율하고, 하나의 완전한 형상으로 가두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남준은 단지, "어디로 인도할지 예측할 수 없는 '방법WAY'을" 찾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나 열쇠"를 발견할 뿐 입니다. 즉 TV 예술에서 IDEA는 더 이상 이상의 '이데아'로 번역될 수 없고, 단지 "미국이 광고회사들이 사용수단으로 써먹는 것과 같은" '아이디어'가 됩니다.이제 예술가는 보다 훌륭한 아이디어를 표현하는(Ex-press) 자들이 아니라 구성하는(Com-pose) 자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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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결정성과 변동성이 지난 10년동안 음악에서는 중점과제였지만, 시각예술에서는 매우 저개발된 매개변수이다."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영원을 포착하고자 획일적인 시간, 일방향적인 시간으로부터 단숨에 벗어나기를 원한다."
"아마도 13대의 독립적인 TV에서 평행적인 흐름들을 동시에 감지하는 것이 신비주의자들의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은,,,,, TV13대도 필요없고, TV 자체도, 전자공학도, 음악도, 예술도 필요 없다,.... 그것은 예술의 가장 행복한 자살이며 .. 이전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가장 어려운 반예술이다."
"누가 이러한 플라톤적이며 불모의 예술의 정점을 이룰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 누군가 정말 그것을 해냈다면 / 나는 그의 이름을 알아서는 안된다. / 나는 그의 이름을 알 필요도 없다."
이 부분에서 백남준의 TV예술의 의미는 보다 명확해 집니다. 백남준의 TV예술은 비결정성과 변동성을 시각예술 분야에서 구현한 새로운 예술입니다. 백남준의 TV예술의 변동성에는 세가지 차원이 존재합니다. 1) 실시간 중계와 같은 가변적인 시각적 이벤트이자 의미론적 이벤트 2) TV전자기 내부회로의 변형 조작 3) 전파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변형 리듬들. (각 차원의 구분이 어떤 기준으로 나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백남준은 변동성을 보여주는 자신의 TV 13대가 영원을 포착하고자 했던 신비주의자들의 오랜 꿈을 이뤄줄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자들은 아마 선 수행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백남준의 TV예술의 기능과 목적에 대해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의 TV예술은 이전의 예술들이 시도했지만 한계를 가졌던, 영원의 포착, 즉 진리의 발견 가능성을 실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술이 진리를 비추는 등대라면, 백남준이 말한 반-예술, 예술의 가장 행복한 자살은 바로 예술이 지시등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가 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것은, 선승들의 호통침과 같이, 곧바로 진리에 도달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의 가능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이거나, 있었다 한들 더 이상 예술로 지각되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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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ESCTASY"이라는 단어 ... 이는 원래 그리스어로 eksisteanai(ek=넘어서는, 바깥의-histanai=세우다, 서 있다.)이다 ... 이 단어는 보통 시적인 영감의 광란, 또는 신성한 것에 대한 명상으로 인한 정신적 변화나 희열을 의미했다"
백남준에게 '황홀' 이라는 단어는 매우 다른 듯한 두 상태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는 광란의 상태와 명상의 상태를 모두 '황홀'한 상태로 여깁니다. 전자가 과잉/흥분된 고양이라면 후자는 절제/집중된 고양입니다. 하지만 이 '황홀'의 상태가 정신적 변화로 이끈다는 점에선 둘이 같습니다. 이는 마치 굿과 명상의 효과는 동일하다는 식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백남준이 말하는, 예술의 역할은 경험자로 하여금 '황홀'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수단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즉, 예술의 도움 없이도 '황홀'의 지경에 이를 수 있다면, 예술은 더이상 쓸모가 없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가장 행복한 자살 - 가장 어려운 반-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황홀'을 단지 비-정상적인 상태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백남준은 사르트르의 보통 상태의 의식에 대한 분석에서 '황홀' 개념이 일상적으로 발현될 수 있다(혹은 이미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항상 내가 아닌 것으로 존재하고, / 나는 항상 나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즉, '황홀(경)'이란 "자기 자신을 벗어난, 보통 상태에 놓인 의식의 '통상적인' 특성"인 것 입니다. 즉, 우리는 언제나 내가 아닌 것으로 존재하고 나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늘 자신을 '넘어서 서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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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것과 유사하게, 백남준은 "영원을 포착하고자 하는 정점 또는 불모의 영점에서 정지하는 것" 과 "신성한 것에 대한 명상으로 인한 정신적 변화나 희열의 의미에서 황홀"을 같은 것으로 바라봅니다. 또한, "독립적인 다수의 평행적인 흐름들을 동시에 감지하는 것" 과 "보통 상태에서 우리의 의식의 끊임없이 지속하는 것" 이 다른 것으로 보여지나, 실은 이 둘은 중요한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둘 모두 "종착역, 결론, 부동성의 절대적 순간, 완성, 상승"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들 상태는 늘 "상대적이고, 붕 떠 있으며, 평이하고, 흔하며,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허공에 걸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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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백남준은 선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는 정치적 애국심보다 문화적 애국심이 더 많은 폐해를 낳으며, 문화적 애국심은 교묘하고 위선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조심스러우며, 또한 "선의 자기선전"은 선의 가장 어리석은 자살 행위라 말하며, 선의 핵심적인 두가지 부정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1) 절대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2) 상대적인 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첫번째 부정은 모든 유한자에게서 체험되는 일상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은 결국 생겨나고 소멸하며를 반복하고, 처한 맥락에 따라 그 의미(혹은 정체성)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선의 두번째 부정이야말로 선의 핵심이라 말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가 유토피아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 10분의 현재 역시 유토피아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 ... / 4천만년의 현재 역시 유토피아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러므로 우리는 배워야 한다. / 어떻게 75퍼센트로 만족할 수 있는지를 / 어떻게 50퍼센트로 만족할 수 있는지를 / ... / 어떻게 0퍼센트로 만족할 수 있는 지를 / 어떻게 -1000퍼센트로 만족할 수 있는 지를.." 무척 심오하지만 단순한 구성을 된 이 문장들은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명제에서 도출된 것들입니다. 즉, 상대적인 시간과 만족감이 때로 절대적인 유토피아, 만족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 입니다. 예를 들어, 유토피아라는 것이 굳이 무엇이다라고 정의될 필요가 없이, 현재가 바로 유토피아이며, 현재는 찰나일 수도 있지만, 수 없이 긴 시간도 '현재' 라고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현재에서 우리는 유토피아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한편, 만족감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만족할 수 있어야 함을 이야기 합니다. 심지어 만족감이 -1000퍼센트라 할지라도 우리는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한편, 백남준은 선 사상으 "반 아방가르드적이며, 반 개척자적이며, 반 케네디적이다." 라고 말하며 "선은 아시아의 빈곤에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선의 개인적 차원에서의 수행과 사회적 차원에서의 적용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만족감을 느낀다면, 사람들은 최소한의 욕망으로도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매우 바람직해 보이지만, 그것이 집단에서 드러났을 때에, (보다 정확히는)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되었을 때, '불필요한 혹은 잉여'의 욕망들이 제거된다는 것은 소비-생산의 동력을상실케 하는 것으로 작동하는 꼴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선을 실천하는 이들이 많은 집단의 경우, 생산양이 절대적으로 줄기 때문에, 빈곤이라는 사태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백남준은 선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백남준은 일본 근대 소설가이자 합리주의와 예술지상주의를 지향했던 R.아쿠타가와의 문장; "영속적인 진화는 영속적인 불만족이다. /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의 유일한 장점이다." 라고 한 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씁니다. "영속적인 불만족은 영속적인 진화이다. / 이것이 나의 실험TV의 주요한 장점이다." 그리고 "좌절은 좌절로서 남는다. / 카타르시스는 없다." 라는 사뭇 충격적인(?) 발언은 합니다. 백남준과 아쿠타가와의 첫 문장은 매우 유사해 보입니다. 결정적인 차이라면, 아쿠타가와는 '영속적인 진화는 영속적인 불만족에 기인한다' 고 생각했고, 백남준은 '영속적인 불만족이 영속적인 진화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두 문장은 선-후, 인과가 역전되어 있습니다. 다시말해, 아쿠타가와는 영속적인 불만족으로 인해 영속적인 진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면, 백남준은 영속적인 진화에 의해 영속적인 불만족이 발생했다고 거꾸로 말한 셈입니다.
저는 여기서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에 비춰 이해해 보았습니다. '카타르시스'는 비극적인 혹은 충격적인(좌절된) 경험을 겪고 뒤따르는 정신적 고양, 승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좌절 뒤에 뒤따르는 성숙을 진화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통상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백남준의 식을 따르면, 진화가 그러한 고통을 불러왔다가 됩니다. 우리는 그 고통에 좌절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이해하지만, 사실 좌절은 변화 과정에서 겪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인 셈입니다. 다시말해,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과정에서의 고통(?)은 변화 중인 상태에 기인 한 것이지, 고통이 있기에 애벌레-번데기-나비의 변태가 가능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어불성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좀 더 확장해 본다면,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변화 역시, 불만족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중이기 때문에 불만족이 발생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백남준의 주장이니, 진실은 알 수 없지요.
(8)
백남준은 자신의 TV예술에 대해 기대하지말라고 말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백남준에게 기대했던 것은, "충격, 표현주의, 낭만주의, 클라이맥스, 놀라움"과 같은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남준의 그러한 표현방식은 TV 예술을 통해 전환점에 이르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연 자신의 첫 전시를 회고하며, 사람들이 대문 위에 걸어둔 황소 대가리가 13대의 더 큰 센세이션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즉, 사람들은 강한 자극, 충격, 놀라움에 더 크게 반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13대의 TV 모니터의 "왜곡 현상(?)"의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게 되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마치, 전자 음악에서 많은 종류의 "소음(?)"의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