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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Jun 10. 2024

벽암록과 백남준

벽암록 제 6칙 운문의 날마다 좋은날, 현재가 유토피아

0. 벽암록 제 6칙 


擧. 雲門垂語云, 十五日已前不問汝, 十五日已後道將一句來. (自代云), 日日是好日


운문 화상의 "날마다 좋은날"이 되도록 해야 한다. 운문화상이 대중들에게 설법하였다. "15일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에 대해서 한마디一句 해보아라." 스스로 자신이 말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지(日日是好日)" 


우리는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현재뿐입니다. 이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인생을 이루고 있지요. 


시간이라는 것은 분절되어 있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세상을 분별로 바라보는 우리들의 익숙한 사고작용 탓이죠. 그렇기에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는 것은 그럴듯한 명분으로 세워진 허상인 셈입니다. 우리는 단지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이 교차되는 곳을 살 뿐입니다.  


하루를 좋은 날로 살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는 시간을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좋은 시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불교의 정신에서 보면 깨달음의 경지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 시간을 말한다고 합니다. 


-1. 백남준 현재가 유토피아이다.


현재가 유토피아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10분의 현재 역시 유토피아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20시간의 현재 역시 유토피아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30개월의 현재 역시 유토피아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4천만 년의 현재 역시 유토피아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백남준은 과거와 미래가 사실은 단지, 어느 지점에서 분절된 현재의 새 이름쯤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현재라는 개념의 시간 범주를 어디까지로 한정해야할지에 대해 우리는 아무도 약속한 바 없습니다. 10분 동안을 현재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20시간은 왜 안되는 것일까요? 나악 4천만년의 시간을 현재로 보지 말아야 할 타당한 명분이 있을까요? 130억년의 우주 역사 전체를 현재라 부르는 것은 왜 안되는 것일까요? 


또한 백남준은 현재가 바로 유토피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ou(없다),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의도적 지명으로 쓰입니다. 즉, 유토피아는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장소'를 일컫는 말입니다. "현재가 유토피아다"라는 말은 그렇기에 상식으로는 맞지 않는 문장입니다. 현재는 시간이고, 유토피아는 장소로 이 둘은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지 않고 시-공간으로 이해한다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언어에 기대지 않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백남준은 유토피아 즉, 이상향이 무엇이다라고 정의내릴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충돌이 일어납니다. 유토피아는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는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여기, 현재라는 시-공간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실재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재라 믿는 현실이 사실은 분별에 의해 지어진 허상이라면 어떨까요? 


-9999999.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날마다 창조적인


현실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유토피아는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기준이 부정된다면, '없다'라는 부정성은 기댈 곳을 잃게 됩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가능한' 무한 가능성의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벽암록 제 6칙의 "날마다 좋은날" 과 백남준의 "현재가 유토피아다"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날마다 창조적인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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